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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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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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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년에 제작된 바쉐론 콘스탄틴의 울트라씬 미닛 리피터

소리를 내는 시계(chiming watch)는 제작과 소비 양쪽 모두 접근하기 어려운 영역입니다. 제작하는 입장에서 따져보면 요구사항이 한 두 개가 아닙니다. 가장 중요한 건 레시피입니다. 컴퓨터가 존재하지 않았던 과거에는 컴플리케이션이 대개 그렇듯 차이밍 워치 제작에 필요한 노하우가 선대에서 후대로, 워치메이커에게서 워치메이커에게로 전승됐습니다.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의 전환, 쿼츠 시계의 등장과 기계식 시계의 몰락, 시계 업계의 재편이 이어지면서 많은 브랜드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거나 과거와는 다른 포지션을 취합니다. 이 과정에서 차이밍 워치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유실되거나 쓰임새를 잃고 맙니다. 레시피가 남아 있던 브랜드는 차이밍 워치의 끈을 놓지 않았지만 그렇지 않은 브랜드는 손을 뗄 수 밖에 없었습니다. 물론 처음부터 새로 시작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허나 그 수는 매우 적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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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거 르쿨트르 칼리버 182

재료랑 레시피가 있어도 요리사가 조리를 해야 음식이 나오듯 차이밍 워치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워치메이커가 필요합니다. 문제는 아무나 차이밍 워치를 다룰 수 없다는 데 있습니다. 차이밍 워치는 정교하게 다듬은 수많은 부품을 상처내지 않고 조립할 수 있는 치밀함과 끈기는 물론이고 소리를 튜닝(tunning)할 수 있는 귀까지 지녀야 합니다. 청각에 의존해 해머와 공을 다듬고 조율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뛰어난 감각과 인내심을 타고 나면 다행인데 그렇지 않다면 훈련을 거듭해야 합니다. 훈련을 받는다고 해도 차이밍 워치를 다룰 수 있을 만큼의 실력이 쌓일 거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파텍필립의 티에리 스턴 회장은 경력이 적어도 15년은 되어야 차이밍 워치를 다룰 수 있는 자격이 주어진다고 합니다. 경력이 충족되어도 실력이 뒷받침되지 못하면 차이밍 워치에 접근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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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 모저앤씨 스위스 알프 워치 미닛 리피터 콘셉트 블랙

힘들게 시계를 만들었으면 팔아야 하는데 이게 또 간단치 않습니다. 철 지난 기술로 만들어낸 소리 나는 물건의 가격을 들으면 억소리가 절로 납니다. 다른 컴플리케이션도 한 가격 하지만 이 정도는 아닙니다. 지르기로 마음을 먹어도 끝이 아닙니다. 기다려야 합니다. 차이밍 워치라는 게 생각보다 귀합니다. 오데마 피게를 예로 들면 1년에 만드는 미닛 리피터의 숫자가 40개가 채 되지 않는다고 합니다. 만들기 어렵고 다룰 수 있는 인원도 한정적이니 당연하겠죠. 공급자 스스로 숫자를 제한해야 할 필요성을 느낄 수도 있습니다. 차이밍 워치를 소비하는 다수는 컬렉터일텐데 이들에게는 희소성이 매우 중요한 가치이기 때문입니다. 이쯤 되니 의문이 생깁니다. 도대체 이걸 왜 만드는 거야? 이유는 차이밍 워치가 가진 상징성 때문입니다. 차이밍 워치를 감당할 역량이 있다는 것은 여러 의미를 내포합니다. 럭셔리, 기술력, 전통 같은 것이죠. 이는 럭셔리 브랜드라면 놓치고 싶지 않은 가치입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고행을 멈출 수 없습니다. 자부심과 사명감은 선수들을 뛰게 만드는 원동력입니다. 차이밍 워치는 그야말로 소수의 플레이어들에 의해 유지되는 그들만의 리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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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닛 리피터와 투르비용을 결합한 제라드-페리고 미닛 리피터 3축 투르비용

참가 선수가 얼마 되지 않는다고 해서 볼거리가 없는 건 아닙니다. 리그에 진출한 이들은 대부분 시계 피라미드의 정점에 있습니다. 세계관 최강자들끼리의 경쟁이 시시할 리가 만무합니다. 부품을 예쁘게 다듬고 제 시간에 소리를 내도록 만드는 것은 기본 소양이므로 차별화하기가 어렵습니다. 경쟁의 핵심은 ‘어떻게’ 입니다. 여기서 다시 크게 두 갈래로 나뉩니다.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와 ‘어떻게 연주할 것인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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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과 해머를 앞으로 끄집어낸 랑에 운트 죄네 자이트베르크 미니트 리피터

먼저 ‘어떻게 보여줄 것인가’ 입니다. 전통적인 차이밍 워치는 신비로운 메커니즘을 감상하기 어려운 구조입니다. 악기에 해당하는 공(gong)과 해머(hammer) 그리고 연주 시간을 관장하는 거버너(governor)가 무브먼트 방향에 위치합니다. 기묘하게 생긴 여러 부품들은 다이얼 아래에 놓입니다. 이런 이유로 차이밍 워치가 연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은 어려운 일입니다. 아름다움을 어필해야 하는 기계식 시계의 현대적 가치에 반하는 상황이 발생하는 지점입니다. 이를 인지한 브랜드는 해머와 공을 다이얼이 있는 전면으로 이동시켜 작동하는 광경을 보여주거나 오픈워크 다이얼을 활용해 메커니즘 전체를 노출시킵니다. 최근 출시되는 차이밍 워치의 상당수는 이처럼 청각을 시각화하는 방식을 선호합니다. 차이밍 워치에서 가장 역동적이라고 할 수 있는 해머가 공을 때리는 모습이나 보통의 시계에서 보기 힘든 랙(rack) 같은 부품의 움직임을 시계를 착용한 상태에서도 즐길 수 있다는 게 장점입니다. 다이얼을 개성적으로 절개하거나 투르비용 같은 컴플리케이션과 연계하면 시너지 효과가 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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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이 정도만 해도 훌륭합니다. 하지만 이 바닥의 콧대 높은 고인물들은 이 정도로는 성에 차지 않습니다. 차이밍 워치의 본질은 결국 소리. 다시 말해, 더 크고 깨끗한 소리를 만들어내는 것이 보다 중요하다고 여깁니다. 이를 위해 소재에 변화를 주거나 구조를 완전히 바꿔버리기도 합니다. 쇼파드는 L.U.C 풀스트라이크를 새로운 해법을 제시한 바 있습니다. 일반적인 차이밍 워치는 열처리 과정을 거친 강화 스틸로 공을 제작하는 반면 L.U.C 풀스트라이크의 그것은 사파이어 크리스털로 만들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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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노블록으로 이루어진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 & 공

사파이어 크리스털 공은 다이얼을 보호하는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와 한 몸을 이룹니다. 해머가 투명한 공을 때리면 맑고 투명한 소리가 귀를 간지럽힙니다. 공은 C(도)와 F(레) 음에 맞춰 튜닝을 했습니다. 시를 알릴 때 소리의 세기는 64.7 데시벨(dB), 분을 알릴 때는 65.8 데시벨(dB) 정도입니다. 사람들이 대화를 나눌 때보다 살짝 높은 수치라고 합니다. 단순히 소재를 바꾼 것 만으로 효과를 톡톡히 본 셈입니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공이 깨지지는 않을까 하는 걱정은 접어두어도 좋습니다. 150만번의 타종 실험을 견뎌냈다고 하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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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리를 키우고 퍼트리는 역할을 하는 사운드보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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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데마 피게 역시 음량을 키우는데 주력했습니다. 로잔 연방 공과대학(Swiss Federal Institute of Technology Lausanne, EPFL)과 8여년 간의 공동 연구 끝에 개발한 해결책은 소리의 공명을 도와주는 부품을 케이스와 케이스백 사이에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사운드보드(soundboard)로 통하는 이 금속판에는 공이 부착됩니다. 전통적인 차이밍 워치의 공이 무브먼트에 연결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접근입니다. 해머가 공을 때리면 사운드보드 전체로 진동이 전해지면서 소리를 증폭시킵니다. 케이스백에 뚫린 구멍을 통해 소리가 밖으로 빠져 나오게 한 것도 소리를 크게 만드는 요인 중 하나입니다. 그럼에도 20m 방수 능력까지 갖추고 있습니다. 지난 2016년 로열 오크 컨셉 시리즈를 앞세워 첫 선을 보인 신기술은 현재 로열 오크와 코드 11.59 바이 오데마 피게 라인에 성공적으로 이식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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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질세라 파텍필립은 최근 미니트 리피터 한 점을 출시했습니다. 어드밴스드 리서치 포르티시모 Ref. 5750P(Advanced Research Fortissimo Ref. 5750P)라는 긴 이름에서 포르티시모(fortissimo)라는 단어가 유독 눈에 띕니다. 포르티시모는 특정 음이나 일부분을 크게 연주하라는 음악 용어입니다. 말 그대로 이 시계는 60m 떨어진 거리에서도 타종 소리를 들을 수 있다고 합니다. 경쟁자들이 내는 소리가 도달할 수 있는 거리는 대략 10m에 불과하다고 합니다. 비결은 포르티시모 시스템으로 명명한 장치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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튜닝 포크처럼 생긴 레버와 두께 0.2mm의 사파이어 크리스털 웨이퍼로 구성된 포르티시모 시스템에는 공이 달려 있습니다. 해머가 공을 치면 진동이 레버를 거쳐 얇은 사파이어 크리스털 웨이퍼로 전달되고, 완전히 고정된 상태가 아닌 사파이어 크리스털 웨이퍼는 진동에 의해 떨리면서 소리를 증폭시킵니다. 사파이어 크리스털 웨이퍼를 사용해서 얻는 이득은 또 있습니다. 무브먼트를 자유롭게 감상할 수 있다는 겁니다. 오데마 피게가 사운드보드를 설치함으로써 소리는 얻었지만 감상의 즐거움은 잃었다면 파텍필립은 어느 하나 놓치지 않는데 성공했습니다. 한편, 파텍필립은 포르티시모 시스템 덕분에 케이스를 시계의 품격에 어울리는 플래티넘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차이밍 워치의 연주를 가장 효과적으로 표현할 수 있는 것은 골드입니다. 알려진 바로는 로즈골드 – 옐로골드 – 화이트골드 순으로 소리가 좋다고 합니다. 플래티넘은 높은 밀도 때문에 전달력이 좋지 않아서 기피하는 소재인데 파텍필립은 소재의 특성마저도 무시할 수 있는 수준에 도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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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미닛 리피터 로즈 골드

이외에도 울트라씬 성애 브랜드 불가리의 옥토 피니씨모 미닛 리피터라든가, 부품에 연결된 모형이 움직이는 율리스 나르당과 자케 드로의 리피터처럼 제갈길 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차이밍 워치는 참가 선수 명단이 거의 바뀌지 않지만 예상치 못한 경기가 펼쳐지는 흥미진진한 리그입니다. 룰만 잘 숙지한다면 보는 재미가 쏠쏠합니다. 그들만의 리그는 기계식 시계가 존재하는 한 앞으로도 계속 됩니다. 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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