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키 마우스 90주년을 기념하는 스와치 X 데미안 허스트 미키 마우스 스페셜 에디션
- 커스터마이징의 대가 뱀포드의 뽀바이 90주년 기념 모델 뽀빠이 GMT 리미티드 에디션
- GPHG에도 참가한 이력이 있는 땡땡 클래식 블랙
여러분들은 시계 하면 무엇이 떠오릅니까? 장인정신? 오랜 전통? 대를 이어 내려온 노하우? 정교한 기술력? 화려한 세공? 대부분은 엄숙하고 진지한 내용입니다. 이것도 모자라 어느 작은 마을에서 수백 년 전에 시작된 탄생비화부터 시대를 앞서간 아이콘까지. 미사여구로 치장한 시계는 호기심을 자극하고 구매욕에 불을 지피지만 때로는 피로감을 불러일으킵니다. 산해진미로 가득한 진수성찬도 매일 먹을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끔은 가볍고 유쾌한 게 좋습니다. 이른바 캐릭터 워치(character watch)는 엄근진스러움 대신 즐길 거리를 찾으려는 이들에게 어울리는 장난감입니다. 캐릭터 워치를 바라보는 시선은 극명하게 나뉩니다. 한쪽에서는 재미난 일탈을 환영하는 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이해하기 어려운 괴작으로 평가절하합니다. 호불호가 확실해서 그런지 처지도 극단적입니다. 외면 받거나, 수집 대상이 되거나.
- 제랄드 젠타 아레나 레트로그레이드 위드 스마일링 디즈니 미키 마우스
지난해 8월 30일부터 9월 3일까지 스위스 제네바에서는 제네바 워치 데이즈(Geneva Watch Days 2021, 이하 GWD)가 열렸습니다. 업계의 거물은 많지 않았지만 워치메이킹 씬에서 나름의 영역을 구축한 브랜드들이 멋진 제품을 선보였습니다. GWD에서 가장 왕성한 활동을 보여준 것은 단연 불가리였습니다. 옥토 로마 월드타이머, 옥토 로마 센트럴 뚜르비용 빠삐용처럼 멋진 시계가 메인을 장식했습니다. 하지만 이 글에서 다루는 주제를 위한 시계는 아닙니다. 주인공은 따로 있습니다. 제랄드 젠타 아레나 레트로그레이드 위드 스마일링 디즈니 미키 마우스입니다. 지난 2000년에 불가리에 흡수된 뒤로 모습을 감췄던 제랄드 젠타(Gerald Genta)의 유산이 부활했다는 소식은 많은 이들의 관심을 불러모았습니다.
- 제랄드 젠타가 남긴 디자인(사진 출처 : www.geraldgenta-heritage.com)
- 제랄드 젠타 도날드 덕 레트로 판타지 스틸(사진 출처 : 안티쿼럼)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와 파텍필립의 노틸러스를 디자인한 럭셔리 스포츠 워치의 아버지는 생전에 10만개가 넘는 시계를 디자인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하루에 10개씩 그려도 족히 27년은 더 걸린다는 계산이 나옵니다. 실로 엄청난 숫자입니다. 다작왕의 아이들 가운데는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시계가 수두룩합니다. 대부분은 다른 브랜드의 이름 하에 출시됐지만 예외도 있습니다. 미키 마우스, 미니 마우스, 구피, 도날드 덕을 다이얼로 옮겨 놓은 디즈니 컬렉션이 대표적입니다. 디즈니와의 정식 계약을 통해 라이선스를 획득한 제랄드 젠타는 1984년 제네바에서 열린 시계 행사에 이 문제작(핑크 팬더도 함께)을 출품합니다. 모난 돌이 정 맞는다고 했던가요? 그의 아내 이블린 젠타에 의하면 제랄드 젠타의 캐릭터 워치는 행사에 참가했던 스위스 유명 브랜드의 관계자들로부터 혹평을 들었다고 합니다. 파격적이어도 너무 파격적이었기 때문이겠죠. 그들의 눈에는 스위스 시계의 드높은 품격을 해치는 용납 못할 물건이었을 겁니다. 하지만 디즈니 컬렉션은 모두의 예상을 뒤엎고 성공을 거두며 브랜드의 대표 모델이 됩니다. 제랄드 젠타의 디즈니 컬렉션은 단순히 캐릭터를 시계에 담아내는 것을 넘어 어떻게 담아야 하는가에 대해서도 고민했던 시계가 아닐까 합니다. 캐릭터의 손가락이나 골프채 또는 야구 방망이를 쥔 손을 바늘 삼아 시간을 가리킵니다. 이런 방식을 사용한 것이 제랄드 젠타가 처음은 아니지만 디스크로 시간을 표시하는 점핑 아워와 레트로그레이드를 접목시켜 자칫 가벼울 수 있는 분위기에 컴플리케이션을 조합해 캐릭터 워치의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는 데에 의의가 있습니다. 천재 디자이너는 캐릭터 워치가 고급 시계 마니아들에게도 어필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준 셈입니다.
캐릭터 워치하면 또 빼놓을 수 없는 게 스누피(Snoopy)가 탑승한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입니다. 찰스 M. 슐츠(Charles M. Schulz)의 만화 피너츠(Peanuts)에 등장하는 귀여운 강아지가 캐릭터 워치의 대표 모델로 등극한 놀라운 이야기는 미 항공우주국(NASA)의 아폴로 계획에서 비롯했습니다. 1964년 미 항공우주국은 까다로운 테스트 끝에 우주 미션을 수행하는데 적합한 시계로 오메가의 스피드마스터를 선정합니다. 그 이후 미지의 세계를 꿈꿨던 영웅들에게는 스피드마스터라는 듬직한 조수가 지급됐습니다. 스피드마스터의 눈부신 활약이 절정에 달한 건 1970년이었습니다. 달을 향해 우주로 날아갔던 미 항공우주국의 7번째 유인 우주선 아폴로 13호가 예기치 못한 사고와 마주했을 때 우주 비행사들은 스피드마스터의 도움으로 위기를 넘길 수 있었고 지구로 무사히 귀환하는데 성공합니다. 미 항공우주국은 그간의 공로를 인정해 오메가에게 실버 스누피 어워드(Silver Snoopy Award)를 수상합니다. 스누피가 마스코트로 채택된 이유는 의외로 단순합니다. 스누피가 미국인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는 익숙하고 친근한 캐릭터였기 때문이었습니다.
- 이제는 이 시계도 가격이...
스누피가 스피드마스터에 처음 얼굴을 들이민 것은 2003년에 출시된 스피드마스터 아폴로 13 “실버 스누피 어워드” 리미티드 에디션이었습니다. 아폴로 13호의 귀환을 기념하기 위해 제작한 이 시계는 5441개 한정 생산됐습니다. 다이얼 9시 방향의 스몰 세컨즈 다이얼에 우주복을 입은 스누피가 “Eyes on the stars”라는 문구와 함께 장식되어 있습니다. 넉넉한 수량 때문이었는지, 캐릭터 워치에 대한 관심이 그다지 뜨겁지 않은 시기여서 그랬는지는 모르겠으나 이 시계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비싸지도, 구하기도 어려운 시계는 아니었습니다.
- 도저히 살 수 없을 만큼 몸 값이 오른 두 번째 스누피
2015년 오메가는 아폴로 13호 45주년을 맞이해 스피드마스터 아폴로 13 “실버 스누피 어워드” 리미티드 에디션을 발표합니다. 수량은 1970개로 확 줄었습니다. 다이얼 디자인은 좀 더 과감해졌습니다. 시계가 나오고 얼마 뒤부터 별안간 프리미엄이 붙기 시작합니다. 시계의 가격은 빠르게 상승세를 타더니 25,000달러를 찍었습니다. 그 뒤로도 두 배 가까이 더 오른 건 함정입니다. 고백컨대 필자에게는 정식 소비자 가격으로 구입할 기회가 있었습니다만 이 시계를 애타게 원하는 지인의 지인에게 양도해버리는 치명적인 실수를 범하고 말았습니다. 캐릭터 워치가 가진 잠재력을 우습게 본 대가는 실로 뼈아팠습니다.
- 하이라이트는 케이스백에
아폴로 13호가 우주로 떠난 지 반 백 년이 지난 2020년에는 대망의 3번째 스누피가 나타납니다. 화려한 화이트 & 블루 컬러에 업그레이드된 핸드와인딩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3861을 탑재한 스피드마스터 “실버 스누피 어워드” 50주년 기념 모델의 하이라이트는 케이스백이었습니다. 아폴로 13호에 사용된 유인 사령선을 탄 스누피가 달 표면으로 날아가는 모습은 충격적이었죠. 처음 시계를 접했을 때 필자는 이게 시계인지 장난감인지 분간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만큼 과감한 아이디어였다는 거겠죠. 확실히 캐릭터 워치는 고정 관념이나 틀을 뛰어넘는데 보다 자유로워 보입니다.
- 하이엔드는 이렇게 만든단 말입니다
- 시티즌의 마블 워치 컬렉션
오데마 피게의 로열 오크 컨셉 “블랙 팬서” 플라잉 투르비용은 많은 애호가들이 대체로 호의적인 반응을 보인 이전 사례와 달리 논란을 일으켰습니다. 소위 스위스 명품 시계 삼대장으로 불리는 오데마 피게가 캐릭터 워치를 만들었다는 게 가장 큰 이유일 겁니다. 사실 이 시계는 오데마 피게가 그간 보여줬던 과감한 모습보다도 두 세 걸음은 더 나아갔습니다. 전 세계에 수많은 팬을 보유한 마블(Marvel)과 스위스 명품 시계의 파트너십도 모자라 마블 코믹스의 히어로 블랙 팬서가 통째로 들어간 시계의 콘셉트는 차치하고 순수하게 시계만 본다면 화려한 기술과 워치메이킹 노하우가 집약된 것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또한, 캐릭터의 특징을 시계로 이식한 시티즌의 마블 워치 컬렉션과 비교하면 오데마 피게는 분명 자신들의 클래스에 맞는 접근을 한 것으로 보입니다.
- 로열 오크 컨셉 “블랙 팬서” 플라잉 투르비용 유니크 피스
오데마 피게의 연구실에 해당하는 로열 오크 컨셉 시리즈 특유의 볼드한 케이스는 블랙 팬서의 비브라늄 수트를 연상시키는 디자인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많은 면으로 이루어진 입체적인 케이스에 다양한 마감 기법을 총동원해 시선을 압도합니다. 문제의 블랙 팬서 조각은 CNC 머신으로 화이트 골드를 가공해 틀을 만든 뒤 30시간에 걸친 인그레이빙과 페인팅 작업을 거쳐 완성됩니다. 제작 수량은 250개. 여기에 화려한 인그레이빙 장식을 추가한 화이트 골드 케이스의 유니크 피스 버전도 있습니다. 오데마 피게는 유튜브 라이브 쇼 <오데마 피게와 친구들>을 통해 로열 오크 컨셉 “블랙 팬서” 플라잉 투르비용 유니크 피스를 경매에 부쳤는데요. 놀랍게도 낙찰가는 520만 달러, 우리 돈으로 약 58억에 달했습니다. 이는 경매에서 판매된 오데마 피게 시계 가운데 가장 높은 가격입니다. 오데마 피게의 열성 팬들 입장에서는 달갑지 않을 수도 있는 이 만화 같은 시계가 브랜드의 헤리티지 모델을 제치고 최고가를 기록한 것은 진정 아이러니입니다.
앞서 언급한 시계들 외에도 시장에는 캐릭터 워치가 여럿 있습니다. 해당 캐릭터의 팬, 색다른 시계를 원하는 부호나 컬렉터들을 겨냥한 캐릭터 워치는 니치 마켓을 위한 이색 상품이지만 소량 생산과 적절한 마케팅 전략을 활용하면 누구나 갖고 싶은 작품이 될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 캐릭터 워치에는 동심을 자극하는 힘이 있습니다. 필자는 제랄드 젠타의 신제품을 보고 문득 일요일 아침 디즈니 만화동산을 시청하기 위해 졸린 눈을 비비면서 TV 앞에 앉았던 어린 시절이 떠올랐습니다. 예전에도 그랬고 앞으로도 캐릭터 워치를 구매하는 일은 아마 없을 테지만 새로운 캐릭터 워치의 등장을 바라보면서 가끔씩 추억 여행을 떠났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스누피가 그중 톱이네요 ㅋ 블랙팬서도 아쉽고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