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가 시계를 통해 시간을 ‘측정’하기 시작한 건 19세기 초반입니다. 즉, 기계식 크로노그래프가 1800년대 초에 나왔다는 얘기입니다. 현재 기네스에 등재된 세계 최초의 크로노그래프는 루이 모네(Louis Moinet)가 1816년 제작한 회중시계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당 시계가 발견되기 전인 2013년까지 세계 최초의 크로노그래프였던 니콜라스 뤼섹(Nicolas Rieussec)의 거치형 크로노그래프는 그로부터 5년 뒤인 1821년에 나왔습니다. 독특하게 다이얼에 잉크를 떨어뜨려 시간을 기록한다는 이유로 훗날 '타임 라이터(Time Writer)'로도 불렸던 이 장치는 당시 루이 18세의 요구대로 경마에서 기록을 측정하기 위한 용도로 쓰였습니다. 니콜라스 뤼섹은 그 해 발명품을 파리의 과학 아카데미에 제출했고 이듬해 바로 특허를 취득했습니다. 이때 명시한 장치의 이름이 시간을 기록한다는 의미에서 비롯한 '크로노그래프’였습니다. 니콜라스 뤼섹이 크로노그래프의 개념을 확립한 셈입니다. 니콜라스 뤼섹 덕분에 기틀이 마련된 크로노그래프는 이후 1831년 라트라팡테, 1862년에는 리셋 기능까지 개발되며 오늘날 기계식 크로노그래프에 걸맞은 소양을 차츰 갖춰 나가기 시작했습니다.
-니콜라스 뤼섹의 거치형 크로노그래프를 재현한 장치와 그를 손목시계로 구현해낸 스타 레거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에 접어든 20세기 크로노그래프에서는 춘추전국시대가 펼쳐집니다. 항공 산업의 발달이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습니다. 조종사들에게 비행 중에 시간을 재빠르게 측정할 수 있는 장비가 필요했고, 이에 따라 크로노그래프의 수요가 대폭 늘어났습니다. 급기야 192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꽃을 피운 모터스포츠가 이에 촉매제 역할을 하게 되자, 크로노그래프에 관심 없던 브랜드들까지 관련 제품의 제작에 뛰어들었습니다. 크로노그래프의 선호도가 높은 이유 중 하나도 이 역사적 배경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비행기 조종사, 밀리터리, 모터 스포츠 등 남성적인 요소가 뭇 남성들의 감성을 자극하기 때문입니다. 과거부터 남심을 훔쳤던 크로노그래프는 이후 1969년 자동 크로노그래프의 등장, 1970년대를 기점으로 시작된 범용 크로노그래프의 확산에 힘입어 자연스레 대중화에 접어들게 됩니다.
-과거 수준급의 크로노그래프로 이름 높았던 미네르바의 광고
-미네르바의 크로노그래프 회중시계
현재 시계 업계에서 크로노그래프를 선보이지 않는 브랜드는 눈 씻고 찾아봐도 찾기 힘듭니다. 하이엔드든 엔트리든 시계를 제조하는 브랜드라면 다른 컴플리케이션은 몰라도 크로노그래프 하나쯤은 다들 필수템으로 보유 중입니다. 서로 간에도 경쟁이 치열합니다. 독자적인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가 각광을 받는 것도 같은 이유입니다. 해당 무브먼트의 생산 여부는 매뉴팩처의 위상과 직결되기도 합니다. 상대적으로 워치메이킹에 늦게 발을 내딛은 몽블랑(Montblanc)은 그런 관점에서 기존 매뉴팩처 브랜드와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지난 2007년 크로노그래프 스페셜리스트로 명성이 자자했던 미네르바(Minerva)를 영입하기에 이릅니다.
-몽블랑의 빌르레 매뉴팩처(아래 사진)가 된 미네르바(위 사진)
몽블랑의 승부수는 보기 좋게 적중했습니다. 이듬해 바로 브랜드 첫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가 나왔습니다. 모델명은 크로노그래프 발전에 이바지한 선구자(2008년 당시만 해도 창시자)를 기리고자 그의 이름을 그대로 가져왔습니다. 물론, 단순히 이름만 차용하진 않았습니다. 과거처럼 고정된 핸즈에 두 원형 디스크가 회전하며 시간을 측정하는 역발상으로 설계해 니콜라스 뤼섹에 헌사하는 의미를 담았습니다. 시간 측정 방식만큼이나 무브먼트(오토매틱 MB R200 또는 지금은 없는 수동 MB R100) 구조도 당시로서는 독특했습니다. 크로노그래프에서 일반적인 밸런스 콕 대신 브릿지 형태로 밸런스를 지지하는 방식을 택했고, 기어트레인 역시 일자에 가까운 브릿지로 고정되는 구조로 설계했습니다. 그 위의 넓직한 플레이트 아래로 더블 배럴, 크로노그래프를 제어하는 컬럼 휠 및 레버가 자리하는데요. 메인 다이얼이 위로 치우친 형태, 그 아래 양 옆으로 자리한 카운터, 8시 방향의 모노 푸셔 등 독창적인 디자인이 그에서 비롯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더블 배럴에서 비롯한 72시간 파워리저브, 낮밤 인디케이터를 포함해 두번째 타임존을 표시하는 기능성 역시 해당 무브먼트의 빼놓을 수 없는 특장점입니다.
-초창기 몽블랑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에 쓰이는 자동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 칼리버 MB R200
몽블랑의 니콜라스 뤼섹은 이후 기존과 차별화된 크로노그래프로서 ‘매뉴팩쳐 몽블랑’의 위상을 높이는 데 적지 않은 공을 세웠습니다. 다만, 2010년대 중반 이후로는 꾸준한 활약을 뒤로 하고 전방에서 물러나게 됩니다. 1858, 헤리티지 컬렉션과 같은 후배들에게 길을 내주기 위함입니다. 물론, 공백기가 그리 길진 않았습니다. 탄생 10주년을 맞은 지난 2018년, 브랜드의 대대적인 리뉴얼과 함께 새롭게 나온 ‘스타 레거시’ 컬렉션을 통해 화려하게 돌아왔습니다. 절묘한 시기에 컴백이 이루어진 걸 보면, 역시나 몽블랑에게는 다 계획이 있었던 셈입니다.
-스타 레거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스타 레거시로 다시 태어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는 이전에 비해 인상이 한결 말끔해졌습니다. 과거 두 핸즈를 고정하던 브리지를 없애고 중앙에 다이아몬드 모양 인디케이터 하나만 두는 등 전체적으로 디테일을 간소화한 덕분입니다. 중앙에서 양 옆의 회전 디스크를 동시에 가리키는 다이아몬드 인디케이터는 1821년 최초의 원형을 재현한 것이라 역사적으로 의미도 남다릅니다. 날짜 창을 6시 방향으로 빼내 디자인적으로 기능하게 만든 것 역시 탁월합니다. 무브먼트는 이전과 동일하게 오토매틱 인하우스 칼리버 MB R200을 탑재하지만, 지금은 과거의 달리 엄격한 기준에 따라 ‘몽블랑 랩 테스트 500’을 거친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습니다. 좀 더 믿음직스럽다는 의미입니다. 올해는 이를 바탕으로 니콜라스 뤼섹이 최초에 제작한 잉크 크로노그래프의 200주년을 기념해 ‘스타 레거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200’도 선보였는데요. 시대를 앞서간 선구자를 기리는 몽블랑의 헌사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세상에 단 하나 뿐인 시계를 출품하는 제9회 '온리 워치' 자선 경매를 위한 제품으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를 선택했습니다. 200주년 에디션처럼 옐로골드 다이얼을 베이스로 삼은 '스타 레거시 뤼섹 크로노그래프 온리 워치 2021'은 다이얼과 같은 소재의 케이스에 GMT 핸즈 및 다이아몬드 인디케이터, 날짜 인덱스를 오렌지 컬러로 디자인해 기존 모델과 차별화를 꾀했습니다. 최종 낙찰가는 7만5000 스위스프랑. 예상 낙찰가(3만~4만5000 스위스프랑)를 훌쩍 뛰어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의 탄생 200주년을 기념하는 ‘스타 레거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200’
-스타 레거시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온리 워치 2021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가 스타 레거시로 돌아왔다면, 과거 한 시대를 풍미한 미네르바의 역사적인 수동 크로노그래프는 지난 2015년 공개된 1858 컬렉션을 통해 화려한 귀환을 알렸습니다. 컬렉션명이 미네르바의 창립 연도를 의미하니 해당 크로노그래프가 1858 라인으로 나온 건 어찌 보면 당연한 수순이었을 터입니다. 당시 100개 한정으로 출시한 ‘1858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 리미티드 에디션 100’은 첫인상부터 과거 미네르바의 크로노그래프를 연상케 합니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창에서 영감을 얻은 커시드럴 핸즈(Cathedral Hands), 야광 도료를 도포한 아라비아 숫자 인덱스, 파일럿 워치에서 유래한 큼지막한 크라운과 그에 설치한 푸시 버튼 등 제품 곳곳에서 미네르바의 흔적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전면은 맛보기에 불과합니다. 시계가 뒤로 돌아서면 역사를 간직한 수동 크로노그래프가 아름다운 자태를 드러내며 관객을 그때 그 시절로 데려갑니다. 테두리에 스크루를 장식한 큼지막한 밸런스, 미네르바의 상징적인 V자 모양 크로노그래프 브릿지와 끝부분이 화살표 형태인 캐링 암 등 미네르바의 전설적인 칼리버 17/29의 환생이라 할만큼 과거 원형과 꼭 닮았습니다. 뭇 애호가들이 1858 크로노그래프에 찬사를 보낸 것도 이 때문입니다.
-1858 컬렉션의 모티프가 된 과거 미네르바의 회중시계 및 손목시계
-2015년 첫선을 보인 1858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 리미티드 에디션 100
미네르바의 대표작을 재현한 1858 크로노그래프는 성공적인 데뷔 덕분에 후속작이 계속해서 뒤따랐습니다. 특유의 복고풍 디자인을 중심으로 블루, 그린 등 얼굴색을 달리하는가 하면 브론즈 케이스를 도입하는 등 트렌드에도 적극적으로 화답했습니다. 특히, 2016년 출시한 블루 다이얼의 스틸 버전은 제네바 시계그랑프리(GPHG)에서 ‘크로노그래프 워치’ 부문을 수상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했습니다. 2018년에는 미네르바의 손목시계 전용 칼리버 13/20을 베이스로 직경 40mm의 다운사이즈 버전(기존은 44mm)을 선보였고, 이듬해는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로까지 영역을 확장했습니다. 외모의 변화와 기능적 진화 속에서도 변치 않는 건 역시나 고전미를 간직한 수동 무브먼트의 존재입니다. 1858 컬렉션의 최고봉인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역시 칼리버 17/29에서 유래했기에 미네르바의 상징적인 요소는 빠짐없이 갖췄습니다.
-1858 크로노그래프 타키미터 블루 리미티드 에디션 100 Ref. 114086 (2016년)
1858 컬렉션의 정상에 해당하는 수동 크로노그래프에 오르는 게 부담스럽다면, 좀더 접근이 용이한 대안으로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있습니다. ‘1858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와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로 선보이는 해당 라인은 검증된 범용 크로노그래프를 활용한 덕분에 가격이 상대적으로 합리적입니다. 엔트리의 가격이 564만원에서 시작합니다. 가격과 타협하기 위해 무브먼트 등급을 낮췄지만, 커시드럴 핸즈, 바이-컴팩스(투 카운터) 구조 등 미네르바를 정의하는 디자인적 요소는 그대로 계승했습니다.
-1858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Ref. 117835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접근성을 높인 자동 크로노그래프가 1858 컬렉션에만 있는 건 아닙니다. 앞서 소개한 스타 레거시에도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를 뒷받침하는 스타 레거시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스타 레거시 크로노그래프 데이/데이트와 같은 든든한 지원군이 있습니다. 새롭게 개편한 몽블랑 헤리티지 컬렉션 또한 빼놓을 수 없겠습니다. 전형적인 트라이-컴팩스(쓰리 카운터) 디자인의 논-데이트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는 물론 1858 컬렉션과 같은 구조의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도 있습니다. 아울러, 몽블랑 헤리티지에는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과 동일하게 수동 칼리버 MB M13.21을 탑재한 고급형 ‘헤리티지 펄소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100’도 있으니 참고 바랍니다.
-스타 레거시 오토매틱 크로노그래프 Ref. 118514
-몽블랑 헤리티지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Ref. 119951
-몽블랑 헤리티지 펄소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100 Ref. 126095
현재 몽블랑만큼 다양한 크로노그래프를 선보이는 브랜드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범용 무브먼트를 활용한 자동 크로노그래프부터 그를 재해석한 모노푸셔 자동 크로노그래프, 다른 브랜드에서 볼 수 없는 독창적인 니콜라스 뤼섹 크로노그래프, 최상위 라인으로 미네르바의 역사가 살아 숨쉬는 수동 크로노그래프 및 라트라팡테까지, 제품 구성도 알찹니다. 몽블랑의 크로노그래프는 미네르바 합류 이후 그렇게 진화에 진화를 거듭해왔습니다. 쉴새 없이 달려온 지난 14년의 여정에 황금기가 있다면, 물 샐틈 없이 탄탄한 라인업을 구축한 지금이 바로 그 때가 아닐까 합니다.
-몽블랑과 타임포럼이 기획한 특별 영상 <Explore Montblanc Timepiece> 2편-크로노그래프
스타레거시 멋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