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반적인 기계식 시계의 바늘은 원을 그리며 회전합니다. 초침이 1회전하면 1분이 지나고, 분침이 또 그만큼 회전하면 1시간이 경과했음을 알립니다. 누구나 다 아는 이 원리는 각종 휠이 맞물려 시간을 표시하는 시계의 근간이 됩니다. 으레 그렇듯, 공공연히 알려진 통념은 깨지기 마련입니다. 기계식 시계의 섭리와도 같은 원운동을 거스른 대표적인 메커니즘이 ‘레트로그레이드(Retrograde)’입니다. 바늘이 원을 그리지 않고 정해진 디스플레이의 범위에 따라 부채꼴을 그립니다. 즉, 1분 또는 1시간, 반나절(또는 요일, 날짜, 월 등)이 지나면 각 바늘이 재빠르게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쳇바퀴 돌 듯 회전하는 일반적인 바늘에 비해 보는 맛이 확실히 있습니다. 뭇 애호가는 눈깜짝할 사이에 바늘이 역행하는 찰나를 포착하기 위해 그 순간을 손꼽아 기다리기도 합니다.
-패트리모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데이트 Ref. 4000U/000R-B516
기계식 시계에 감상의 재미를 더하는 레트로그레이드는 보기보다 까다로운 설계를 요합니다. 일반적인 레트로그레이드 핸드라 하면 별도의 피니언과 스프링으로 구성된 축에 고정되며, 기어트레인에는 스네일 캠이 추가됩니다. 둘 사이를 연결하는 레버가 기어트레인의 움직임에 따라 레트로그레이드 핸드를 앞으로 이동시키는데요. 해당 바늘이 끝자락에 이르면 레버의 뾰족한 갈고리 부분이 스네일 캠의 홈에 위치하고, 그와 동시에 피니언에 맞물린 반대쪽 랙(Rack, 직선으로 이를 낸 기어) 부분이 스프링의 탄력을 이용해 바늘을 원점으로 재빠르게 보냅니다. 무브먼트에 무리가 갈 수 있는 과정이 반복되니 충격이나 마모에 대해 좀더 신경을 써야 하는 건 물론입니다.
-레트로그레이드 아워 디스플레이를 적용한 테이블 클락 Ref. 10548(1927년)
옐로골드, 오닉스, 록 크리스탈, 라피스 라줄리로 장식한 외형에 8일 파워리저브를 지원하는 수동 무브먼트 탑재.
레트로그레이드가 처음 나온 건 18세기 중반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독일의 한 천문시계에서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를 활용했다고 하는데요. 회중시계의 경우 1906년 발간된 스위스 워치메이킹 저널(Journal Suisse d'horlogerie)에 따르면, 1791년 어느 워치메이커가 제작한 회중시계에서 처음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날짜와 월을 표시했다고 합니다. 파리의 한 시계제조사 메종 레핀(Masion Lépine) 역시 비슷한 시기에 레트로그레이드 아워 핸드를 장착한 회중시계를 선보인 바 있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레트로그레이드와 영혼의 단짝을 이루는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도 그때쯤 세상에 나왔습니다. 자리를 잡고 성행하기 시작한 건 19세기 초반. 관련 메커니즘의 선구자격이라 할 수 있는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atantin) 역시 이때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를 접목한 회중시계(Ref. 10132)를 선보였습니다. 다만, 1824년 출시한 이 모델에서 레트로그레이드를 찾아볼 순 없습니다. 당시만 해도 무브먼트에 무리가 갈 수 있는 레트로그레이드에 대한 수요가 적었기 때문입니다.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를 도입한 회중시계 Ref. 10132(1824년)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에 다이얼 아래의 핸즈로 분을 표시하는 회중시계 Ref. 10152(1929년)
바쉐론 콘스탄틴을 비롯 유수의 워치메이커들이 레트로그레이드를 본격적으로 선보이기 시작한 건 1920년대 이후입니다. 당시는 회중시계에서 손목시계로 넘어가는 이행기라 두 형태가 서로 공존했습니다. 회중시계는 다음 세대에 바통을 넘겨줘야 하는 끝자락이다 보니 일반적인 것보다 좀더 특별한 제품이 각광을 받았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을 예로 들자면, 다이얼에 중국인 마술사를 입체적으로 표현한 ‘브하 엉 래흐(Bras en l’Air, 팔을 공중에 든)’ 포켓 워치 Ref. 11060을 꼽을 수 있겠습니다. 1930년 탄생한 이 회중시계는 10시 방향의 푸시 버튼을 누르면, 중국인 마술사의 양 팔이 올라가며 양쪽 부채꼴 디스플레이 맞춰 현재 시(왼쪽)와 분(오른쪽)을 각각 가리킵니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마술사의 동작이 바뀌다 보니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케이스와 같은 옐로골드 베이스의 마술사 모티프는 그에 따라 에나멜 및 인그레이빙을 통해 익살스럽게 표현했습니다. 1937년 선보인 ‘라 캬하벨(La Carvelle, 대항해시대의 쾌속범선)’ 포켓 워치 역시 이와 같은 바이-레트로그레이드 디스플레이를 물려 받았습니다. 이름처럼 과거 바다를 누비던 범선이 전작의 마술사가 하던 역할을 대신합니다. 양쪽 돛에서 뻗어 나온 두 개의 핸즈가 마술사의 팔처럼 시간을 표시합니다. 범선 모티프는 케이스 소재와 같은 플래티넘을 베이스로 정교하게 조각했고, 표면에 다이아몬드를 빼곡히 장식해 화려함을 배가했습니다.
-바이-레트로그레이드 디스플레이로 시간을 표시하는 ‘브하 엉 래흐(Bras en l’Air)’ 포켓 워치 Ref. 11060(1930년)
-‘라 캬하벨(La Carvelle)’ 포켓 워치 Ref. 11119(1937년)
1930년대 회중시계에서 바이-레트로그레이드 모델이 있었다면, 손목시계에서는 1940년 선보인 전설적인 ‘돈 판초(Don Pancho)’ Ref. 3620이 있었습니다. ‘돈 판초’는 당시 바쉐론 콘스탄틴의 마드리드 공식 딜러 ‘브루킹(Brooking)’에 해당 모델의 제작을 의뢰한 프란시스코 마르티네즈 라노(Francisco Martinez Llano)의 별명이라 합니다. 후세에 애호가들이 그의 별명을 시계 닉네임으로 그대로 사용한 것이죠. 과거 Ref. 3620이 완성되기까지는 약 4년의 시간이 걸렸습니다. 시계 케이스는 당시 유행하던 아르데코 사조를 반영해 토노형으로 제작했고 독특하게 크라운을 12시 방향에 설치했습니다. 원래 크라운이 있어야 할 3시 방향에는 미닛 리피터 작동을 위한 슬라이드가 자리합니다. 케이스와 동일한 형태의 다이얼에는 기능적인 요소가 오밀조밀하게 모여 있습니다. 6시 방향에 스몰세컨드와 함께 요일을 나타내는 인디케이터가 위치하고, 시계의 가치를 드높이는 레트로그레이드 디스플레이는 다이얼 상단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시/분침 아래에 놓인 푸른색 바늘이 1~31까지 길게 늘어선 이 디스플레이를 가리키며 날짜를 표시합니다. 디스플레이와 평행을 이루는 로고 아래는 공식 딜러 ‘브루킹’의 문구가 표시 돼있습니다. 지금은 드물지만 당시만 해도 브랜드명과 함께 공식 딜러의 이름을 다이얼에 표시하는 게 빈번했습니다.
케이스 뒷면에 프란시스코 마르티네즈의 라노의 이니셜을 새긴 ‘돈 판초’는 1947년 그가 사망한 이후 약 60년 동안 가족 금고에 잠들어 있었다고 합니다. 후손들이 이를 발견하고 판매하기로 결정하자, 바쉐론 콘스탄틴은 긴 동면에서 깨어난 이 시계를 재빠르게 수집해 복원 작업에 들어갔습니다. 독창적인 케이스는 그대로 유지했고, 무브먼트는 최대한 당시의 오리지널 부품을 활용하면서 세척 및 수리 작업을 진행했습니다. 다만, 다이얼은 훼손된 상황이라 새로운 것으로 교체했다고 합니다. 목욕재계를 성공적으로 마친 ‘돈 판초’는 이후 애호가 및 컬렉터들의 위시리스트에 이름을 올리게 됩니다.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에 미닛 리피터를 결합한 몇 안 되는 초창기 손목시계로서 가치가 남달랐기 때문입니다. 많은 이들의 관심 속에 ‘돈 판초’는 결국 2019년 필립스 경매에서 74만 스위스프랑(한화로 약 9억 4000만원)의 낙찰가에 새로운 주인을 찾아가며 길고 긴 드라마의 마침표를 찍었습니다.
‘돈 판초’가 잠들어 있는 동안 바쉐론 콘스탄틴의 레트로그레이드 역시 주춤했습니다. 1940년대 이후 다이버 워치의 등장과 레이싱 크로노그래프의 흥행으로 레트로그레이드와 같은 특수 메커니즘에 대한 수요가 줄어들었고, 급기야 1970년대에는 쿼츠 파동까지 겹치며 이렇다할 활약을 펼칠 기회가 없었습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레트로그레이드가 다시금 수면 위로 떠오른 건 스위스 시계산업과 함께 기계식 시계가 부활한 1990년대입니다. 첫 스타트는 메르카토르(Mercator)가 끊었습니다. Ref. 12130을 부여 받은 이 시계는 16세기 지리학자 게라르 메르카토르(Gerard Mercator)에 경의를 담아 1994년 첫선을 보였습니다. 에나멜링을 통해 다이얼에 지질학 정보를 담은 세계지도를 정교하게 표현했으며, 무엇보다 20세기 초반 회중시계의 바이-레트로그레이드 디스플레이를 손목시계로 구현해냈습니다. 에나멜링과 바이-레트로그레이드가 짝을 이룬 해당 콘셉트는 이후 메종의 예술혼을 불태우는 메티에다르(Metiers d’Art) 컬렉션에서 하나의 장르로 자리매김하게 됩니다.
-메르카토르(Mercator) Ref. 12130(1994년)
메르카토르 출시 이후 약 3년이 흐른 1997년, 베를린에서 개최된 시계 박람회에서는 마침내 레트로그레이드와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가 합을 이룬 황금 조합의 손목시계 ‘살타렐로(Saltarello)’가 첫선을 보였습니다. 사각형 실루엣의 독특한 쿠션형 케이스를 활용한 이 시계는 정석대로 12시 방향에 점핑 아워를 표시하는 창이 자리하고, 그 아래로 0~60까지 표시한 레트로그레이드 디스플레이가 위치합니다. 부채꼴을 그리며 분을 가리키는 바늘은 맨 아래 자리해 다이얼의 균형감을 맞춥니다. 바늘의 궤적을 따라 다이얼에 기요셰 패턴을 장식한 것 역시 인상적입니다.
-점핑 아워 디스플레이에 레트로그레이드를 결합한 ‘살타렐로(Saltarello)’ 옐로골드 버전 Ref. 11000(1997년)
바쉐론 콘스탄틴의 레트로그레이드는 이후 새로운 밀레니엄이 도래하고 기계식 시계가 또 한 번의 전성기를 맞이하자 정규 컬렉션에도 자연스레 스며들었습니다. 과거 ‘돈 판초’처럼 날짜를 레트로그레이드로 표시한 Ref. 47245와 Ref. 47247, 그리고 이를 베이스로 퍼페추얼 캘린더를 구현한 Ref. 47031이 대표적입니다. 2000년대 초반 출시한 각각은 메종의 1950년대 타임피스에서 영감을 얻은 ‘패트리모니’ 컬렉션의 일원으로 한 시대를 풍미했습니다. 앞선 모델이 길을 잘 닦아 놓았기에 최근 선보이는 레트로그레이드 데이-데이트(Ref. 4000U 계열) 및 문페이즈 레트로그레이드 데이트(Ref. 4010U 계열) 역시 빛을 볼 수 있었습니다.
-날짜를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표시하는 패트리모니 Ref. 47245(사진 출처: 소더비)
-레트로그레이드 날짜를 포함한 퍼페추얼 캘린더를 지원하는 패트리모니 Ref. 47031(사진 출처: 앤티쿼럼)
레트로그레이드가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주요한 헤리티지라는 사실은 지난 2015년 브랜드 설립 260주년을 기념해 선보인 Rf. 57260에도 잘 드러납니다. 57개의 기능으로 세계에서 가장 복잡한 시계로 군림한 이 대작은 메종을 대표하는 핵심 기술을 총망라했습니다. 레트로그레이드 역시 이에 속해 날짜는 물론 스플릿-세컨즈 크로노그래프를 표시하는 메커니즘으로 쓰였습니다. 특히, 더블 레트로그레이드 방식으로 구동하는 스플릿-세컨즈 크로노그래프는 세계 최초로서 시계사의 한 페이지를 화려하게 장식했습니다.
-창립 260주년 기념 에디션 Ref. 57260
레트로그레이드의 활약상은 이듬해도 계속됩니다. 역사적인 Ref. 57260에서 영감을 받아 출시한 손목시계 ‘메트르 캐비노티에 레트로그레이드 아밀러리 투르비용’에서 과거 바이-레트로그레이드 모델처럼 시와 분을 그와 같은 방식으로 표시했습니다. 이렇게 같은 축에 레트로그레이드 시침과 분침을 같이 두면 정오와 자정에 두 핸즈가 동시에 원점으로 돌아가게 되는데요. 바쉐론 콘스탄틴은 이와 관련해 두 핸즈가 서로 충돌하지 않고 부드럽게 작동하기 위해 각각에 연결된 캠에 특수한 릴리즈 시스템을 도입했습니다. 좀더 재빠른 플라이백을 위해 각 핸즈를 티타늄으로 제작한 것 역시 특기할 만합니다.
-캐비노티에 레트로그레이드 아밀러리 투르비용 유니크 피스
바쉐론 콘스탄틴에서 레트로그레이드는 주문 제작으로 이루어지는 궁극의 ‘캐비노티에’ 컬렉션에 자주 등장하는 단골이기도 합니다. 지난해 ‘캐비노티에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템포’에서는 독특하게도 문페이즈 디스플레이를 가리키는 형태로 쓰였고, 올해는 ‘캐비노티에 아밀러리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플라네타리아’에서 날짜를 포함해 각 캘린더 정보를 표시하는 방식으로 제 몫을 다했습니다. 물론, 레트로그레이드가 각 모델에서 주연은 아닐 수 있습니다. 주인공을 묵묵히 뒷받침하는 하나의 조연에 더 가깝습니다.
-캐비노티에 그랜드 컴플리케이션 스플릿 세컨즈 크로노그래프-템포
-캐비노티에 아밀러리 투르비용 퍼페추얼 캘린더-플라네타리아
바쉐론 콘스탄틴 하이 워치메이킹을 대변하는 캐비노티에 컬렉션의 주인공은 앞으로도 화려한 퍼포먼스를 뽐내는 미닛 리피터, 투르비용과 같은 컴플리케이션이 맡을 것으로 보입니다. 다만, 걸출한 주연만 득실득실한 작품은 역시나 과유불급입니다. 적재적소에 또 다른 재미를 더할 든든한 조력자가 있어야 비로소 작품의 완성도가 올라갑니다. 우리는 주연만큼이나 녹록치 않은 존재감을 내뿜는 그들을 가리켜 ‘씬스틸러’라 부릅니다. 바쉐론 콘스탄틴의 하이 워치메이킹에서는 레트로그레이드가 바로 그런 존재가 아닐까 합니다.
예술입니다 아 바세론 넘 이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