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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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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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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만들래? 

올해 초 애플(Apple)과 현대자동차그룹이 애플카 생산 협의를 진행 중이라는 보도가 전해졌습니다. 세계 최대의 IT기업과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자동차 메이커가 테이블에 마주 앉았다는 소식에 세간의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돌연 협상이 중단됐다는 뉴스와 함께 현대자동차그룹이 협의를 부인하는 공시를 발표하며 해프닝은 일단락됐습니다. 이에 대해 일각에서는 현대자동차그룹이 애플과의 제휴를 통해 얻는 이득이 크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애플은 자동차를 만들어 줄 제조업체를 원할 뿐 동등한 위치의 파트너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미래를 바꿀 산업 혁명으로 여겨지는 전기차 시장에 명운을 건 현대자동차그룹 입장에서 아이폰을 생산하는 대만의 어느 기업과 같은 대접을 받는 건 원하는 그림이 아니었을 겁니다. 급한 것은 애플입니다. 현대자동차그룹과의 협의가 무산되고 폭스바겐, 닛산과도 접촉했지만 번번이 무위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사과 엠블럼을 단 자동차를 제작해줄 도우미는 아직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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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매뉴팩처 소리 들으려면 이 정도는 해야...

보면 사고 싶어지는 디자인과 익숙해지면 빠져나올 수 없는 생태계를 구축하며 시장을 석권해온 애플은 제품을 직접 제조하지 않습니다. 완제품을 만드는데 필요한 업체를 선정해 밸류체인을 구축하고 관리하는 주문자 위탁 생산 방식(OEM)을 선호합니다. 애플이 설계하면 누군가가 이를 만들어주는 구조입니다. 마치 소규모 공방이 부품이나 무브먼트를 납품하면 브랜드가 상품화 및 판매를 맡은 19세기 이전의 시계 제조 행태와 유사합니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일련의 생산 과정을 한 지붕 아래에서 수행하는 수직통합형 모델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매뉴팩처라는 개념이 퍼지기 시작합니다. 매뉴팩처의 사전적 의미는 '제조하다' 이지만 시계 업계에서는 거의 모든 생산 공정을 책임진다는 뜻으로 쓰입니다. 매뉴팩처는 오늘날 애호가들이 중요하게 생각하는 가치로 굳어졌습니다. 설계에서 시작해 밸런스 스프링, 주얼, 다이얼, 글라스 등 몇몇 부품을 제외한 대부분을 혼자 힘으로 만들고 조립해 완성품으로 가공하는 능력을 응당 지녀야 할 덕목으로 여깁니다. 매뉴팩처링의 순도가 높으면 높을수록 브랜드의 위상과 가격도 덩달아 올라갑니다. 오랜 전통과 기술력을 보유한 브랜드에게 매뉴팩처에 대한 기대와 환상은 무리한 요구가 아닐 겁니다. 하지만 워치메이킹의 무대에 새로이 진입하는 뉴 페이스들은 사정이 다릅니다. 이들은 생산을 위한 제반 시설과 노하우가 절대적으로 부족하지만 아이디어와 기획력으로 부족한 부분을 만회하려 합니다. 상상을 눈앞의 현실로 구체화시켜줄 조력자만 수배한다면 얼마든지 시계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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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망 24시를 정복한 포드 GT 40의 리버리에서 영감을 얻은 고릴라 워치 패스트백 드리프트 미라주

사각형의 볼드한 케이스와 화려한 컬러. 한 눈에 봐도 기성 브랜드의 작품과는 거리가 있어 보입니다. 고릴라 워치(Gorilla Watch)는 오데마 피게의 CAO(Chief Artistic Officer)를 역임한 옥타비오 가르시아(Octavio Garcia)와 오데마 피게, IWC 등지에서 커리어를 쌓은 디자이너 루카스 고프(Lukas Gopp)가 2016년에 설립한 브랜드입니다. 이들의 시계를 관통하는 주제는 20세기 중반을 장식한 머슬카와 스포츠 워치에서 영감을 얻은 디자인 그리고 최신 워치메이킹 씬에서 부각되는 세라믹, 카본, 티타늄 같은 비전통적인 소재의 융합입니다. 이 바닥에 들어오는 많은 신입들이 대게 그렇듯 고릴라 워치도 정형적인 모습에서 탈피한 디자인과 메커니즘을 어필합니다. 브랜드에 대한 지식과 정보가 전무한 사람들의 관심을 사로잡을 한 방이 필요하기 때문이죠. 대표작인 드리프트(Drift)는 12개의 숫자가 적힌 세 개의 디스크가 회전하며 시간을 표시합니다. 오데마 피게의 스타 휠(Star Wheel), 우르베르크의 새틀라이트(Satellite) 디스플레이와 유사합니다. 표시하는 정보는 시간이 전부일 정도로 단순하지만 그것을 표현하는 방식을 비틀면서 분위기를 반전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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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려한 얼굴과 달리 뒷모습은 다소 실망스러울 수 있습니다.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 사파이어 크리스털 너머로 보이네요. 블랙 PVD 코팅한 로터에 고릴라라는 이름을 적었을 뿐이지 영락 없는 ETA 2824입니다. 흔하디 흔한 ETA 2824를 개조한 곳은 보셰(Vaucher)입니다. 리차드밀과 에르메스를 비롯한 고급 브랜드에 범용 무브먼트를 납품한 보셰는 고릴라 워치의 요구에 따라 모듈을 개발해 ETA 2824를 근사하게 업그레이드하는데 성공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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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릴라 워치 패스트백 선더볼트 크로노그래프

후속작인 패스트백 선더볼트 크로노그래프도 동일한 흐름을 이어갑니다. 세라믹, 알루미늄, 티타늄으로 쌓은 울타리 안에는 크로노그래프 무브먼트가 담겨 있습니다. 뒤를 보니 ETA 2892-A2입니다. 이번에는 누구의 도움을 받았을까요? 정답은 다이얼에 적혀있습니다. 발레 드 주(Vallée de Joux)에 있는 뒤부아 데프라(Dubois Dépraz). ETA 무브먼트에 쓰이는 크로노그래프 모듈을 개발하는 곳으로 유명합니다. 추가로 무브먼트를 스켈레톤 처리해 ETA의 흔적을 최대한 지우고 고릴라 워치의 스포티하고 자유분방한 정체성을 부각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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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조 카본, 아노다이즈 알루미늄, 티타늄, 세라믹을 층층이 올린 화려한 케이스를 비롯해 찰떡 궁합인 러버 스트랩까지 외부에서 공급 받습니다. 이쯤되니 가격이 걱정입니다. 대량 생산이 불가능한 구조이기 때문에 더욱 그럴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보기와는 달리 수긍하기 어려운 가격은 아닙니다. 드리프트는 에디션에 따라 상이하지만 3000~4000달러 사이에 가격이 형성됐고, 패스트백 선더볼트는 8500달러입니다. 겉은 화려하지만 가격은 되도록이면 착해야 한다는 고릴라 워치의 외침은 허언이 아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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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왼쪽부터)장-마크 비더레흐트, 마르코 보라치오, 롭 딕킨슨

시계를 좋아하는 사람이 자동차도 좋아할 확률은 매우 높습니다. 반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싱어 리이매진드(Singer Reimagined)는 정교한 워치메이킹과 스피드에 흠뻑 취한 사나이들에게 어울리는 시계입니다. 싱어 리이매진드의 모기업쯤 되는 싱어 비히클 디자인(Singer Vehicle Design)은 시계와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본업은 오래된 포르쉐 911을 튜닝하는 것입니다. 포르쉐 뿐만 아니라 시계에도 관심이 많았던 싱어 비히클 디자인의 창립자 롭 딕킨슨(Rob Dickinson)은 자신만의 시계 브랜드를 원했습니다. 그러나 자동차만큼 시계를 알지는 못했기에 혼자서는 할 수 없는 노릇이었죠. 그리하여 이탈리아 출신의 시계 디자이너이자 컨설턴트 마르코 보라치오(Marco Borraccino)와 손을 잡고 싱어 리이매진드를 론칭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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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8 GPHG 크로노그래프 부문 수상작 트랙 1 홍콩 에디션

콘셉트는 20세기 중반의 스포츠 워치와 자동차의 이미지를 적절히 가미한 시계의 재해석(reimagine)이었습니다. 프로젝트가 구체화되자 시계를 만들어줄 파트너가 절실했습니다. 여기서 등판한 구원투수가 장-마크 비더레흐트(Jean-Marc Wiederrecht)입니다. 콧수염이 매력적인 이 분은 반클리프 아펠, 에르메스 등 유명 브랜드의 컴플리케이션을 제작한 아장호(Agenhor)의 대표입니다. 크로노그래프와 스포츠카의 유기적 화합에 힘입어 싱어 리이매진드는 데뷔 2년 차인 2018년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에서 크로노그래프 워치 부문에서 대상을 거머쥐는 쾌거를 이룹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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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르쉐 싱어 911 DLS(사진 : 탑기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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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랙1 DLS 크로노그래프

싱어 리이매진드의 최신작 트랙1 DLS 크로노그래프(Track1 DLS Chronograph)는 싱어 비히클 디자인의 포르쉐 싱어 911 DLS 프로젝트와 연동되는 제품입니다. 여기서 DLS란 다이나믹스 & 라이트웨이팅 스터디(Dynamics and Lightweighting Study)의 약자입니다. 고성능화와 경량화를 통해 포르쉐 911의 잠재력을 극한까지 끌어올렸다고 하네요. DLS의 취지에 걸맞게 트랙1 DLS 크로노그래프 역시 경량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습니다. 시계에서 가장 많은 무게를 차지하는 미들 케이스는 단조 카본으로 제작했습니다. 베젤과 크라운을 비롯해 크로노그래프 푸시 버튼과 케이스백의 소재는 폴리시드 처리한 5등급 티타늄입니다. 싱어와 DLS가 큼지막하게 적힌 그레이 다이얼은 보통의 시계와 다를 바 없어 보이나 시간을 읽고 측정하는 방법은 판이하게 다릅니다. 다이얼 중앙에 놓인 3개의 주황색 바늘은 모두 크로노그래프 측정과 관련이 있습니다. 시간과 분은 인덱스가 적힌 플랜지 바깥쪽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페리페럴 디스크를 통해 확인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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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노그래프 칼리버 싱어 6361은 앞서 언급했듯이 아장호에서 제작을 담당했습니다. 매시간과 분마다 크로노그래프 핸즈가 정확히 한 칸씩 점핑하도록 설계된 이 무브먼트는 아장호가 개발한 아장클러치(AgenClutch)를 탑재해 캐링암과 수직 클러치의 장점만을 가져온 것이 특징입니다. 다시 말해, 공간은 적게 쓰면서 크로노그래프 작동 시 바늘이 튀는 현상을 억제했습니다. 한 가지 재미 있는 건 이 무브먼트가 셀프와인딩이라는 겁니다.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는 로터는 사실 다이얼 아래에 감춰져 있습니다. 크로노그래프 바늘이 전부 중앙에 꽂혀 있는 구조로 인해 가능한 설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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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랙1 DLS 크로노그래프는 포르쉐 싱어 911 DLS 오너만 구입할 수 있다는 조건이 걸려있습니다. 오너의 요구에 따라 커스터마이징도 가능하다고 하네요. 참고로 포르쉐 싱어 911 DLS는 75개만 생산됨에도 불구하고 진작 품절됐습니다. 고로 이 시계를 보고 싶다면 포르쉐 싱어 911 DLS 오너부터 수소문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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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동차의 자도 모르는 애플이 레거시 완성차 업체와 경쟁을 펼칠 세상이 다가왔습니다. 고릴라 워치나 싱어 리이매진드와 같은 신생 브랜드는 매뉴팩처링을 위해 비용과 시간을 투입하는 대신 개발과 마케팅에 전념하며 전통과 시간을 초월합니다. 워치메이킹의 세계에서 매뉴팩처의 위상은 꺾이지 않겠지만 새로운 방식으로 시계에 접근하는 앙팡 테리블의 도전 역시 앞으로 계속 이어질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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