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달라진 워치스앤원더스 제네바. 이젠 집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지난달 워치스앤원더스 제네바 2021(Watches & Wonders Geneva 2021)이 열렸습니다. 쇼는 계속되어야 한다는 말마따나 차갑고 건조한 비대면의 시대에 시계 회사들은 모니터 너머에서 그간의 연구와 노력의 결실을 공개했습니다. 공식 웹사이트나 유튜브를 통해 신제품을 실시간으로 확인하는가 하면 누구든지 패널에게 질문을 던지며 주체적으로 참여할 수도 있었습니다. 그 동안 지켜봤던 일방향의 대규모 박람회와는 분명 다른 모습이었습니다. 시간과 장소의 제약은 결코 장애물이 되지 못했습니다. 작금의 상황이 종식되면 서로 얼굴을 맞대고 시계를 직접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다시 찾아오겠지만 앞으로도 디지털 스페이스에서 열리는 행사는 지속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 Green is the new black. 파텍필립 노틸러스 Ref. 5711/1A-014
- 1950년대 제품을 복원한 론진 실버 애로우
쏟아지는 신제품과 함께 어김없이 등장하는 단어가 있으니 바로 트렌드입니다. 잠시 기억을 되짚어 과거로 돌아가보겠습니다. 투르비용 같은 컴플리케이션의 득세, 니콜라스 하이에크 전 스와치그룹 회장이 던진 무브먼트 공급 화두에 인하우스 혹은 매뉴팩처로의 전환이 주요 이슈로 대두된 것이 떠오릅니다. 시계가 가녀린 손목을 지닌 이들이 넘보기 어려울 정도로 커진 것도 빼놓을 수 없겠죠. 롱 파워리저브는 최신 고급 시계가 마땅히 갖추어야 할 덕목이 되었습니다. 실리콘을 위시한 신소재의 등장으로 시계의 전반적인 성능을 한 단계 격상시킬 토대가 마련되기 시작했습니다. 최근에는 어떨까요? 트렌드는 모습만 바꾼 채 시장을 맴돌고 있습니다. 불과 몇 년 전만 하더라도 뉴 블랙으로 일컬어지던 블루의 바통을 이어받은 그린이라든지 시계 크기의 감소 같은 트렌드를 포착할 수 있습니다. 헤리티지 모델을 현대적으로 해석하는 레트로 워치의 인기도 식지 않았습니다. 시야를 넓히면 보다 큰 틀에서의 근본적인 변화도 감지됩니다. 새로 유입된 유저와 그들이 중요하게 여기는 가치 및 소비 행태가 변화를 주도하고 있습니다. 전통과 관습에 얽매이고 싶어하지 않는 모습은 시계 회사에게 달라진 모습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 용기가 필요한 오리스 다이버즈 식스티-파이브 코튼 캔디
- 이런 모습은 처음이야. 브라이틀링 프리미에르 B09 크로노그래프 40 피스타치오 그린
첫 번째는 차별화와 다양성입니다. 커스터마이징과 다품종 소량 생산에 열광하는 이들은 특별한 무언가를 소비하여 타인과 차별화하는 행위를 개성의 발현이자 자아의 실현으로 여기는 듯 합니다. 이를 위해서라면 얼마든지 지불할 용의가 있어 보입니다. 제조사 입장에서 위 주제에 빠르고 손쉽게 대응하는 길은 색이나 소재를 다각화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 어느 때보다 다양한 색상의 시계가 출시되고 있습니다. 대세임을 선포한 그린부터 알록달록한 파스텔톤까지 상상할 수 있는 거의 모든 색의 시계를 만나볼 수 있습니다. 또한, 동색이라고 해도 누가 만드느냐에 따라 분위기나 뉘앙스는 천지차이입니다. 일례로 높은 인기를 구가하는 블루와 그린은 다크, 스모크드, 트로피컬, 피스타치오 같은 수식어를 붙여 설명할 만큼 스펙트럼이 넓어졌습니다.
- 라임 골드(Lime Gold)로 케이스를 제작한 몽블랑 1858 스플릿 세컨드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 18
- 은까지 동원한 튜더의 블랙 베이 피프티-에잇 925
소재에서도 비슷한 현상이 나타납니다. 스테인리스스틸과 골드의 지위는 여전히 굳건하지만 특별함을 갈구하는 고객들은 보다 매력적인 재료를 찾고 있습니다. 비밀스러운 레시피로 완성한 골드를 내세우는 브랜드가 하나 둘씩 늘어나는 추세입니다. 높은 몸값을 자랑하는 사파이어 크리스털 케이스나 베젤 인서트의 표준으로 자리매김한 세라믹에 다양한 색을 입히는 것이 더는 놀랍지 않습니다. 컬트적 인기를 끌었던 브론즈 역시 이제는 제법 많은 브랜드가 다루고 있습니다. 호불호가 갈리는 파티나를 억제한 사용자 친화적 브론즈의 등장은 기존의 스테인리스스틸과 골드 일변도에서 탈피하고 싶어하는 이들이 많아졌고 앞으로도 그 수가 늘어날 수 있음을 함의하고 있습니다. 앤티크 시계에서나 볼법한 은을 다시 소환한 튜더(Tudor)의 블랙 베이 피프티-에잇 925는 게임의 판을 키울 다크호스입니다.
- 클래식은 영원하다. 까르띠에 클로쉬 드 까르띠에 워치
- Olivier Arnaud © Cartier
- 바쉐론 콘스탄틴 히스토릭 아메리칸 1921. 36.5mm가 더 좋은 건 나만일까...
두 번째는 허물어지는 경계입니다. 이제까지는 남성용과 여성용으로 컬렉션을 나누어 시계의 성별을 정의하는 게 일반적이었습니다. 허나 이런 편견은 조금씩 깨지고 있습니다. 경계가 불분명한 젠더리스 워치가 속속 등장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미 몇 년 전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는 코드 11.59를 출시하면서 해당 컬렉션이 특정 세대나 성별을 겨냥한 것이 아님을 밝히며 이 같은 흐름을 예고했습니다. 예거 르쿨트르(Jaeger-Lecoultre)의 리베르소나 까르띠에(Cartier)의 파샤, 탱크, 클로쉬는 성별을 따지는 게 무의미함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디자인이 동일한 두 가지 버전(40mm와 36.5mm)으로 선보인 바쉐론 콘스탄틴(Vacheron Constantin)의 히스토릭 아메리칸 1921은 중성적인 매력을 어필합니다. 남자가 붉은색 다이얼, 케이스 지름이 30mm 중반에 그치는 아담한 크기, 보석으로 치장한 시계를 선택해도, 반대로 여자가 기계식이나 컴플리케이션을 넘어 크고 볼드한 시계를 즐겨도 이상하지 않은 지금은 성별보다 개성이 앞서는 시대인 듯 합니다.
- 야누스의 얼굴을 지닌 피아제 폴로 스켈레톤
- 브레이슬릿과 러버 스트랩으로도 즐길 수 있는 IWC 파일럿 워치 43
경계의 균열은 시계의 역할에도 영향을 끼칩니다. 더 이상 시계는 정해진 틀에 국한되지 않는 듯 합니다.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로 인해 근무와 휴식, 여가와 일상을 자유로이 넘나들며 착용할 수 있는 시계가 각광을 받고 있습니다. 브랜드마다 명칭은 다르지만 이른바 퀵 체인지 시스템은 이런 현상을 가속화시킵니다. 사용자가 별도의 도구 없이 직접 손쉽게 스트랩과 브레이슬릿을 교체할 수 있는 이 방식은 이제 없으면 서운할 정도로 빠르게 확산되는 중입니다. 많은 브랜드는 디자인의 연속성과 사용자 편의성을 두루 고려한 독자적인 솔루션을 개발하는데 주력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다양한 색상과 소재의 스트랩을 제작해 소비자들에게 시계를 가지고 놀 수 있는 주체적 권한과 선택권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덩달아 장르의 경계도 희미해지고 있습니다. 드레스 워치와 스포츠 워치의 성질을 모두 지닌 피아제(Piaget)의 폴로 스켈레톤, 파일럿 워치의 전통적인 규범을 따르는 대신 스포츠 워치의 면모를 부각시킨 IWC의 파일럿 워치가 예입니다.
- 현존 재활용 시계 끝판왕 파네라이 섭머저블 e랩-아이디 PAM01225
- 성분의 약 80%가 천연 식물 섬유로 구성된 IWC의 팀버텍스 스트랩
마지막은 기업의 사회적 책임입니다. 지난 2013년 쇼파드(Chopard)가 지속 가능한 럭셔리 산업을 위한 여정(Journey to Sustainable Luxury)이라는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공정채굴 인증 골드(페어마인드 골드)를 선보였을 때만 하더라도 여기에 주목하는 이들은 지금처럼 많지 않았습니다. 기업의 사회적 책임(CSR, Corporate Social Responsibility)은 상생과 협력, 공정과 평등, 환경 보호와 같은 공공선을 추구함으로써 기업 활동의 정당성을 유지하고 소비자에게 긍정적 인식을 심어줍니다. 친환경적으로 건설한 매뉴팩처로 이산화탄소 무배출을 선언한 바 있는 IWC는 친환경 종이를 기반으로 제작한 팀버텍스(TimeberTex) 스트랩을, 까르띠에는 사과에서 나온 폐기물을 생화학 처리해 재활용한 스트랩을 선보였습니다. 케이스뿐만 아니라 다이얼과 무브먼트까지 에코 티타늄™(EcoTitanium™)으로 제작한 파네라이(Panerai), 폐어망과 플라스틱을 재활용한 에코닐 스트랩과 패키지를 개발한 브라이틀링(Breitling), 해양 환경 보호에 앞장서는 블랑팡(Blancpain) 등 많은 브랜드가 지속가능성에 대한 고민을 공유하자며 목소리를 높이고 있습니다. 기업이 사회적 책임을 다하는 모습에 사람들이 화답하고, 이는 제품의 판매로도 이어지는 만큼 앞으로도 시계 제조사는 건강한 활동을 강화해 나갈 것으로 예상됩니다.
트렌드를 잘 짚으신 칼럼이네요~^^
잘 봤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