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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F컬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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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I-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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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에 출시되는 시계를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옵니다. 대량 생산한 완제품의 뛰어난 마감과 성능. 최첨단 산업에서 쓰일 법한 소재. 체계적이고 자동화된 설비 시설.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엄청난 진보를 이뤘습니다. 그에 반해 기계식 시계를 구성하는 핵심 기술은 이미 오래 전에 탄생했습니다. 머리카락처럼 가느다란 헤어스프링, 좌우로 반복 회전하는 밸런스 휠과 이를 제어하는 레버 이스케이프먼트는 물론이고 투르비용이나 리피터 같이 화려하고 복잡한 컴플리케이션에 이르기까지 짧게는 수십 년에서 길게는 수백 년 전에 기술적 토대가 마련됐습니다. 기계식 시계는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동시에 과거와 끈끈하게 이어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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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6년 동안 6개의 신기록을 세우다. 불가리의 옥토 울트라씬 시리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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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연구 개발에만 4년이 걸린 피아제의 최종 병기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브랜드의 기술력이 우수한지를 가늠할 때 여러 잣대를 동원합니다. 부품을 제조하고 무브먼트를 조립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느 정도까지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지를 따져봅니다. 컴플리케이션을 구사할 수 있는 능력도 빠지지 않고 거론됩니다. 모든 분야에서 종횡무진하는 브랜드도 있지만 대게는 특정 컴플리케이션에 전문적인 양상을 띱니다. 그리고 해당 컴플리케이션은 브랜드의 정체성으로 굳어지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브레게는 투르비용, 태그호이어는 크로노그래프가 떠오르는 것처럼 말입니다. 그렇다면 울트라씬은 어떻습니까? 현재 울트라씬의 맹주를 꼽으라면 단연 불가리와 피아제입니다. 예거 르쿨트르도 빠지면 섭섭한 울트라씬의 강자이지만 최근에는 다소 주춤하면서 불가리와 피아제의 2강 체제로 굳어진 듯한 분위기입니다. 피아제가 20세기 중반부터 울트라씬을 비중 있게 연구해온 것과 달리 불가리는 21세기에 접어들어 브랜드 정체성을 울트라씬으로 정의했다는 차이가 있습니다. 어쨌든 둘은 21세기 울트라씬 워치메이킹의 선두 자리를 두고 엎치락뒤치락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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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거 블랑팡이 여섯 개의 마스터피스 시리즈를 선보였을 때 울트라씬은 당당히 그 리스트에 이름을 올렸을 만큼 진작부터 컴플리케이션의 한 장르로 분류됐습니다. 제작과 조립이 무척 까다롭기 때문에 울트라씬을 상품화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닌 브랜드는 많지 않습니다. 당연히 시장에서 마주할 수 있는 제품의 종류나 수도 적습니다. 원만한 작동을 담보할 수 있는 한계까지 부품을 얇게 만들어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부품을 완벽하게 조립해 시계에 생명을 불어넣을 수 있는 고도로 숙련된 워치메이커의 숫자도 한정되어 있습니다. 설계부터 제작, 조립, 검수에 이르기까지 무엇 하나 만만한 게 없습니다. 이 모든 것을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수행해야 하는 울트라씬 스페셜리스트들은 저마다의 노하우를 갖고 있습니다. 헌데 이게 어느 날 갑자기 생길 수가 없는 노릇입니다. 제조사들은 완전히 새로운 개념을 창조하거나 울트라씬의 해결책을 제시했던 선대의 기술을 응용하고 발전시켜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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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과 (아래)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 오토매틱
 
2014년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으로 울트라씬 경쟁의 불씨를 지핀 불가리는 2020년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 크로노그래프 스켈레톤 오토매틱까지 6년간 6개의 신기록을 수립하는 대업을 이룹니다. 불가리가 주목을 받은 이유는 기능을 최소화하고 부품을 최대한 많이 줄여도 여의치 않은 울트라씬에 도리어 기능을 추가했기 때문입니다. 6개의 제품 가운데 투르비용이 들어간 시계가 3개, 크로노그래프는 2개나 됩니다. 심지어 미니트 리피터도 있습니다. 그 중에서 살펴볼 모델은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핸드와인딩 칼리버 BVL 268, 두께 1.95mm)과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 오토매틱(셀프와인딩 칼리버 BVL 288, 두께 1.95mm)입니다. 보통 시계는 브리지와 메인 플레이트로 톱니바퀴와 여러 부품을 양쪽에서 견고하게 고정합니다. 그래야만 안정적으로 작동할 수 있거니와 충격이나 진동에도 견뎌낼 수 있습니다. 그에 반해 두 모델은 두께를 줄인다는 명목 하에 브리지를 없애버렸습니다. 투르비용과 맞닿은 기어트레인의 마지막 톱니바퀴를 제외한 나머지 것들은 마치 허공에 둥둥 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동력이 발생하며 많은 힘이 가해지는 배럴도 예외는 아닙니다. 플라잉 투르비용 조차 고정된 흔적을 찾기 어렵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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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의 엔진 칼리버 268의 스켈레톤 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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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 투르비용 오토매틱에 탑재된 칼리버 2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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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 라살의 칼리버 1200(출처 : 위키피디아)
 
불가리는 해결책으로 볼 베어링 시스템을 제시했습니다. 동그란 베어링을 톱니바퀴나 배럴 및 투르비용의 축 또는 측면에 배치함으로써 이탈하지 않고 회전할 수 있도록 설계했습니다. 볼 베어링은 대부분의 셀프와인딩 시계에서 발견할 수 있습니다. 로터를 부드럽게 회전시키고 큰 힘을 견뎌내는데 볼 베어링이 탁월하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불가리는 이런 묘안을 어떻게 생각해 냈을까요? 해답은 1970년대에 개발된 장 라살(Jean Lassalle)의 울트라씬 무브먼트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장 라살은 울트라씬에 혁명을 몰고 온 브랜드였습니다. 이들은 두께 1.2mm의 핸드와인딩 칼리버 1200과 2.08mm의 셀프와인딩 칼리버 2000를 만들어 경쟁자들을 압도했습니다. 장 라살은 두께를 줄이기 위해 톱니바퀴를 고정하는 브리지를 없애는 극단적인 설계를 제시하는 동시에 볼 베어링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방법을 꺼내 들었습니다. 볼 베어링을 사용하니 톱니바퀴의 피벗도 필요가 없었고, 당연히 피벗을 붙잡아주는 주얼도 쓸모가 없어졌습니다. 장 라살의 칼리버 1200에 들어간 주얼 수는 9개에 불과했습니다. 이 같은 특징은 볼 베어링을 사용한 불가리의 시계에도 고스란히 나타납니다. 불가리 옥토 피니씨모에 들어가는 칼리버 268의 주얼 수는 고작 13개 뿐입니다. 시간을 제외하면 아무런 기능이 없는 심플 핸드와인딩 무브먼트에 필요한 주얼 수가 17개임을 감안하면 확연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비록 장 라살의 무브먼트는 불안정한 구조로 인해 사장되고 말았지만 먼 훗날 불가리 울트라씬 워치에 단초를 제공할 줄은 누구도 몰랐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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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제 알티플라노 38m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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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제 알티플라노 울티메이트 컨셉
 
1957년 핸드와인딩 칼리버 9P(두께 2mm), 1960년 셀프와인딩 칼리버 12P(두께 2.3mm)을 내리 출시하며 울트라씬의 다크호스로 부상한 피아제는 2014년 알티플라노 38mm로 다시 한 번 왕좌를 차지합니다. 케이스 두께가 3.65mm로 당시 세계에서 가장 얇은 시계라는 칭호를 얻었는데요. 여기에는 핸드와인딩 칼리버 900P가 탑재됐습니다. 피아제가 제시한 솔루션은 배럴에서 밸런스 휠까지 이어지는 기어트레인 일체와 시간을 표시하는 다이얼을 비슷한 높이에 수평으로 설치하는 것이었습니다. 이를 위해서는 반대쪽에 있어야 할 기어트레인과 밸런스 휠을 전면으로 끄집어내야 했습니다. 피아제는 기어트레인을 한쪽으로 몰아 넣고 남은 공간에 다이얼을 설치했습니다. 덕분에 시계 두께 4mm의 벽을 허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두께를 줄일 수 있었던 진짜 비밀은 따로 있었으니 바로 케이스백이었습니다. 기어트레인과 다이얼을 고정할 메인 플레이트의 역할을 케이스백에게 맡긴 겁니다. 얼핏 나사로 고정된 평범한 케이스백처럼 보이지만 안쪽 면에 부품을 설치할 수 있도록 파내고 구멍을 뚫었습니다. 이로써 무브먼트 두께에서 상당 부분을 차지하는 메인 플레이트를 손쉽게 제거할 수 있었습니다. 피아제는 이 기술을 파고들어 울티메이트 컨셉 워치에까지 적용함으로써 울트라씬의 신기원을 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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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데마 피게 Ref. 25643BA
 
케이스백과 메인 플레이트의 일체화. 이 기발한 아이디어는 오데마 피게가 1986년에 제작한 세계 최초의 셀프와인딩 투르비용 손목시계 Ref. 25643BA에서 비롯된 듯 합니다. 1980년대생이라고 하기에는 제법 올드해 보이는 옐로골드 사각형 케이스의 두께는 5.3mm에 불과했습니다. 그 안에는 그때까지 제작된 어떤 투르비용보다 작고(티타늄 투르비용 케이지 지름 7.2mm) 가벼운(0.134g) 투르비용을 가진 셀프와인딩 칼리버 2870이 들어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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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케이스백에 주얼이 곧장 박힌 독특한 구조의 오데마 피게 Ref .25643BA(출처 : 크리스티)
 
오데마 피게는 시계를 두껍게 만드는 투르비용과 셀프와인딩을 두께 5.3mm의 얇은 틀 속에 가두는데 성공했습니다. 비결은 케이스백과 무브먼트의 메인 플레이트를 일체화하는 것이었습니다. Ref. 25643BA의 케이스백을 보면 루비가 박힌 것을 확인할 수 있는데 케이스백이 곧 메인 플레이트임을 알려주는 흔적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브먼트와 셀프와인딩 또한 일반적인 구조에서 탈피해야 했습니다. 오데마 피게가 들고 나온 것은 해머 와인딩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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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브레게 퍼페추얼 워치 No° 15
 
해머 와인딩에 쓰이는 로터는 360°를 회전하지 않습니다. 대신 특정한 각도를 앞뒤로 왔다 갔다 반복해서 움직이는 로터가 쓰입니다. 이 방식은 셀프와인딩을 발명한 아브라함-루이 브레게가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해머 와인딩은 20세기까지 이어졌지만 결국 360° 회전 로터에 밀려 외면 받았습니다. 오데마 피게도 피아제가 그랬듯이 과거에서 영감을 얻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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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아제 핸드와인딩 칼리버 9P & 셀프와인딩 칼리버 12P. 칼리버 20P는 피아제의 적자가 아니기 때문에 선택받지 못했을 지도...
 
앞서 불가리는 장 라살의 무브먼트를 응용했다고 설명했는데요. 과거 장 라살의 칼리버 1200을 칼리버 20P로 이름만 바꿔 사용한 브랜드가 있었으니 다름 아닌 피아제였습니다. 피아제에게는 장 라살의 울트라씬 무브먼트 생산 권리를 취득한 누벨 르마니아로부터 칼리버 1200을 공급받아 칼리버 20P로 이름을 바꾸고 사용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럼에도 피아제는 내부로부터가 아닌 외부에서 답을 찾았습니다. 자세한 내막은 알 길이 없으나 피아제가 헤리티지를 활용하지 않은 것은 흥미로운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울트라씬을 예로 들었지만 시계에 적용된 기능이나 해법 중 상당수는 과거를 복기해 다듬은 것입니다. 시대를 너무 앞서 나간 탓에 당시에는 실패를 맛봤던 것일지라도 최신 기술로 재구성하면 얼마든지 훌륭한 답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현대의 시계들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워치메이킹의 발전을 이끄는 원동력은 고리타분해 보이기는 하지만 온고지신의 정신에 입각한 창조와 개선에 있는 듯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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