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종 코로나바이러스가 전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있습니다. 고약한 역병이 시계 업계에 미친 여파는 이노님께서 자세히 알려 주셨습니다(궁금하신 분들은 여기를 클릭해 주세요). 사람들의 시선은 바젤월드(Baselworld)와 워치스 & 원더스 제네바(Watches & Wonders Geneva)로 향합니다. 점점 커져가는 온라인의 영향력 때문에 위기에 몰린 오프라인 박람회가 의기투합한 첫 해부터 예상치 못한 암초와 맞닥뜨렸습니다. 특히 스와치 그룹(Swatch Group), 브라이틀링(Breitling), 세이코(Seiko), 불가리(Bvlgari) 등 주요 고객이 줄줄이 이탈하며 존폐 위기론까지 불거지는 바젤월드와 주최측인 MCH 그룹은 사태의 추이를 예의주시하고 있을 겁니다.
- 1군으로 올라온 H. 모저앤씨(H. Moser & Cie)와 MB&F
개명 신고를 마친 워치스 & 원더스 제네바에서도 변화가 감지됩니다. 일단 참가 선수가 35개에서 31개로 줄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차이는 미미한 수준이나 결론에 이르기까지 몇 차례 덧셈과 뺄셈을 반복했습니다. 먼저, 독자 행동을 선언한 오데마 피게(Audemars Piguet)와 리차드 밀(Richard Mille)은 미련 없이 소속팀을 떠났습니다. 여기에 그뢰벨 포지(Greubel Forsey)까지 가세하니 워치스 & 원더스 제네바로서는 제법 속이 쓰렸을 겁니다. 이들은 리치몬트 그룹 소속 브랜드가 주도하는 행사에서 다양성과 깊이를 더해준 외인부대였습니다. 워치스 & 원더스 제네바를 주최하는 고급시계재단(FHH)은 독립 시계 브랜드의 기수인 MB&F와 H. 모저앤씨(H. Moser & Cie)를 까레 데 오를로저(Carré des Horlogers)에서 히스토릭 메종(Historic Maisons)으로 지위를 격상시키며 대응했습니다.
까레 데 오를로저 관에 설치된 라커의 주인도 대거 바뀔 것으로 보입니다. 카리 부틸라이넨(Kari Voutilainen), 우르베르크(Urwerk), 오틀랑스(Hautlence), 엘레강트 바이 프랑수아 폴 주른(élégante by F.P. Journe), 크로노메트리 페르디낭트 베르투(Chronométrie Ferdinand Berthoud), 로맹 고티에(Romain Gauthier)가 짐을 쌌습니다. 엘레강트 바이 프랑수아 폴 주른을 제외한 나머지 브랜드는 바젤월드 참가 리스트에 이름이 있는 걸로 보아 중복 참가를 피하기 위한 전략적 선택으로 보여집니다. 2개 브랜드가 히스토릭 메종으로 승격하고 6개 브랜드와의 재계약이 무산되면서 거대한 구멍이 생겼습니다. 당연히 프런트가 넋 놓고 구경만 하지는 않았겠죠. 잠재력을 가진 유망주를 오프시즌에 영입하면서 선수단을 꾸리는 데 성공했습니다. 올해 워치스 & 원더스 제네바에 데뷔하는 신인은 아놀드 앤 선(Arnold & Son), 퍼넬(C. Purnell), 파베르제(Fabergé), 레벨리온(Rebellion), 루디 실바(Rudis Sylva)까지 총 다섯입니다. 이들에게는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과거 바젤월드에 참가했던 브랜드라는 겁니다. 이적생들은 이제 팔렉스포(Palexpo)라는 새로운 구장에서 경기를 펼치게 됩니다. 워치메이킹 씬에서 확고한 지위를 다진 이전 브랜드와 비교하면 중량감이 떨어지는 게 사실입니다. 향후 계약을 연장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습니다만 활약을 기대하는 마음에서 간단히 소개해 볼까 합니다.
- 로열 컬렉션 네뷸라(Nebula)
- HM 퍼페추얼 문 어벤츄린(HM Perpetual Moon Aventurine)
- 데드 비트 세컨드를 구현한 DSTB
아놀드 앤 선(Arnold & Son)은 아마 이들 가운데 가장 인지도가 높은 브랜드일 겁니다. 2012년 라 주 페레(La Joux-Perret)와 함께 시티즌(Citizen) 그룹에 인수된 아놀드 앤 선은 영국의 위대한 워치메이커 존 아놀드(John Arnold)의 업적을 계승하고 있습니다. 존 아놀드는 아브라함 루이 브레게와 가깝게 지내며 워치메이킹의 발전에 크게 기여한 인물이기도 하죠. 현재 아놀드 앤 선은 다수의 인하우스 칼리버를 제작할 만큼 준수한 기술력을 보유했으며, 에나멜 기법을 활용한 메티 에 다르(Métiers d'Art) 컬렉션도 전개하고 있습니다.
- 이스케이프 더블 투르비용(Escape Double Tourbillon)
슬로건인 온리 투르비용(Only Tourbillon)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퍼넬(C. Purnell)은 투르비용 외길 인생을 걷고 있습니다. 퍼넬의 투르비용 사랑은 창립자 세실 퍼넬에게서 비롯됐습니다. 그의 조부 조나단 퍼넬은 워치메이킹을 독학한 아마추어 워치메이커로 투르비용에 남다른 열정을 가졌다고 전해집니다. 그 열정은 손자인 세실 퍼넬에게 이어졌고, 세실 퍼넬은 유지를 받들어 2006년 할아버지의 이름을 딴 브랜드를 론칭하기에 이릅니다. 퍼넬은 1년에 15개 정도의 시계를 생산합니다. 고속으로 360° 회전하는 3축 투르비용을 탑재한 이스케이프 시리즈는 시선을 제압하기 충분해 보입니다.
- 다이얼 중앙에 설치한 작은 창으로 24시간 세컨드 타임을 표시하는 비지오네르 DTZ(Visionnaire DTZ)
보석 달걀로 유명한 파베르제(Fabergé)는 과거 러시아 황실과 유럽 귀족들에게 열렬한 지지를 받았던 주얼러입니다. 한동안 명맥이 끊겼으나 2007년 부활하며 하이엔드 주얼리와 시계 사업에 도전장을 내밀었습니다. 이후 장-마르크 비더레흐트(Jean-Marc Wiederrecht)가 지휘하는 컴플리케이션 스페셜리스트 아장호(Agenhor)와 협업한 시계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았습니다. 파베르제는 2015년 레이디 컴플리케 피콕(Lady Compliquée Peacock)으로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 레이디 하이 메크 워치(Ladies' High-Mech Watch Prize, 여성용 컴플리케이션) 우승을 거머쥔 데 이어 이듬해에는 비지오네르 DTZ(Visionnaire DTZ)로 트래블 타임 워치 부문까지 석권하는 쾌거를 이뤘습니다.
모터 스포츠에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 봤을 이름이죠. 레벨리온(Rebellion)은 시계 제조사이자 세계 내구 선수권 대회(WEC)에서 활약하는 모터 스포츠팀입니다. 시계를 만드는 레벨리온 타임피스와 레이싱 대회에 참가하는 레벨리온 레이싱으로 사업부가 나뉘어 있습니다. 태생부터 레이싱과 밀접한 땔래야 땔 수 없는지라 시계도 자동차에서 영감을 받은 흔적이 역력합니다.
- 파워리저브가 1000시간인 T-1000
- 트웬티-원 스리 핸즈 투어 오토(Twenty-One 3 Hands Tour Auto) 에디션
최근에는 비교적 얌전한 시계도 나오는 듯 한데 예전에 출시한 T-1000이나 프로메테우스(Prometheus) 같은 시계를 보면 시계라기 보다는 머신에 가까운 모습을 하고 있습니다. 전위적인 외관은 차치하더라도 1000시간에 달하는 극단적인 파워리저브, 체인을 활용한 독특한 설계와 구조 등 좀처럼 접하기 힘든 구성이 돋보입니다.
마지막으로 루디 실바(Rudis Sylva)는 5인방 가운데 가장 전통적인 방식으로 시계를 제작하는 고전학파에 속합니다. 소수 정예로 운영되는 작은 브랜드이지만 구성원 각각은 각 분야의 대가들입니다. 이들은 엔진 터닝 머신을 이용해 기요셰 패턴을 새기고, 전통적인 방식으로 화로를 이용해 에나멜 다이얼을 제조합니다. 인그레이버는 곳곳에 화려한 장식을 더합니다. 이쯤 되면 예상하셨겠지만 모든 부품은 수작업으로 마감합니다. 일련의 공정은 마치 과거 분업화된 스위스 시계 제조 방식을 떠올리게 합니다.
루디 실바는 투르비용을 변형한 하모니어스 오실레이터(Harmonious Oscillator)라는 특수한 장치를 개발했는데요. 두 개의 밸런스를 담은 케이지는 1분에 한 바퀴 회전합니다. 밸런스 휠은 표면에 난 톱니에 의해 서로 맞물리고, 동력은 하나의 이스케이프먼트로부터 전달받습니다. 궁극적인 목표는 오차를 줄이는 겁니다. 정확히는 투르비용처럼 수직 상태에서의 오차를 최대한 없애기 위해서라고 합니다. 하나의 밸런스가 수직 상태에서 미세하게 빨라질 때 나머지 하나는 반대로 느려지면서 오차를 상쇄하는 방식입니다. 이론적으로는 투르비용보다 더 정확하다고 하는데 얼마나 효과가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아직 바젤월드와 워치스 & 원더스 제네바의 향방에 대해 어떤 소식도 들려오지 않고 있습니다. 부디 조속히 사태가 진정 국면에 접어들기를 바라며, 타임포럼 리포트를 통해서 이들의 시계를 소개할 수 있길 기대해 봅니다.
처음 들어본 브랜드가 3개 되네요...역시나 시계의 세계는 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