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럼(Corum)은 1955년, 워치메이커 출신의 가스통 라이(Gaston Ries)와 그의 조카이자 사업가인 르네 반와트(René Bannwart)에 의해 창립했습니다. 특히 르네 반와트는 파텍필립을 거쳐 오메가에서 디자인 부서를 정비하고, 오메가를 대표하는 컬렉션인 씨마스터(Seamaster, 1948년)와 컨스텔레이션(Constellation, 1952)을 탄생시키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린 시절부터 자신의 시계 회사를 이끌고 싶었던 반와트는 유효한 토론을 가능케 하는 최소한의 참석 인원을 뜻하는 라틴어(Quorum)에서 착안해 코럼을 공동 창립함으로써 본격적으로 자신의 창의적인 역량을 분출하기 시작합니다.
- 르네 반와트 ⓒ Corum
코럼의 로고인 열쇠 문양은 창립 이래 현재까지 고수되고 있는데, 새로운 세계의 문을 열어주는 열쇠처럼 코럼의 모험정신과 워치메이킹을 향한 열정을 상징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코럼은 회사 설립 1년여 만에 첫 시계 컬렉션을 출시하는데 성공하고, 이듬해인 1957년 가로로 길쭉한 금관형 케이스에 작은 기계식 수동 무브먼트를 탑재한 골든 튜브(Golden Tube)를 출시, 1958년 중국인들이 즐겨 쓰는 피라미드 모양의 챙이 넓은 모자에서 영감을 얻은 독특한 케이스 형태의 일명 차이니즈 햇(Chinese Hat)을 발표해 업계에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습니다.
- 1958년 발표한 차이니즈 햇 시계 ⓒ Corum Archives
1960년에는 사각형 케이스에 클래식한 디자인의 첫 어드미럴스 컵(Admiral’s Cup) 모델이 등장합니다. ‘제독의 경기’라는 뜻의 어드미럴스 컵은 1957년부터 2년마다 한번씩 개최되는 국제 요트경기대회에서 이름을 따온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의식해서인지 케이스백에도 어드미럴스 컵 각인과 함께 요트 배 한 척을 음각했습니다. 하지만 당시의 어드미럴스 컵 라인은 클래식한 드레스 워치였을 뿐, 12각 베젤을 갖춘 현대적인 스포츠 워치 형태를 띠게 된 건 그로부터 한참 후의 일입니다.
- 1964년 발표한 골드 코인 시계 ⓒ Corum
제40대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이 생전 애용했다.
1964년에는 20달러짜리 미국 금화를 반으로 절삭한 뒤 그 안에 얇은 두께의 울트라-씬 수동 무브먼트를 탑재한 첫 골드 코인 시계를 발표합니다. 미국을 상징하는 독수리가 새겨진 더블 이글(Double Eagle)을 바탕으로 한 코럼의 골드 코인 시리즈는 리처드 닉슨, 지미 카터, 로널드 레이건, 조지 H. W. 부시 등 미국의 역대 대통령들을 비롯한 세계 명사들 사이에서 화제를 모았고, 현재까지도 코럼 하면 떠오르는 가장 상징적인 시계 중 하나로 손꼽히고 있습니다.
- 코럼 라쇼드퐁 본사 및 매뉴팩처 전경 ⓒ Corum
1965년 큼지막한 사각 케이스 시계인 버킹엄(Buckingham)을, 1966년 다이얼이 아닌 베젤에 로마숫자 인덱스를 새기고 로마의 초대 황제에서 이름을 딴 로물루스(Romvlvs)를, 1970년 실제 새의 깃털을 채집해 다이얼 장식 소재로 활용한 페더 워치(Feather watch)를 출시하는 등 코럼은 창립 초창기부터 이렇듯 동시대 여느 브랜드들과 차별화된 시계를 만들고자 노력해왔습니다. 유서 깊은 시계 도시 라쇼드퐁 인근에 뿌리를 내리고 있었기에 신생브랜드로서 부족한 기술적인 부분은 오랜 전통의 제조사들로부터 노하우를 전수받을 수 있었고, 젊고 개성 강한 워치메이커를 영입하기 위한 노력도 계속됐습니다.
이후 1980년 코럼은 직사각형 케이스 안에 수공으로 조각을 새긴 일명 바게트(Baguette) 모양의 길쭉한 수동 무브먼트를 탑재한 전무후무한 손목시계, 골든 브릿지(Golden Bridge)를 런칭합니다. 골든 브릿지란 말 그대로 골드 소재의 브릿지 안에 무브먼트를 구성하는 부품들을 일렬로 배열했음을 의미합니다.
- 1980년대 골든 브릿지 지면광고 이미지 ⓒ Corum
전통적으로 기계식 무브먼트의 기어트레인은 옆으로 펼쳐진 형태가 대부분이지만, 코럼의 골든 브릿지는 기어트레인을 리니어 형태(종렬)로 배열하고 이를 가능하도록 해당 부품들을 더욱 작고 정밀하게 제작, 조립함으로써 무브먼트 디자인을 시계 전체의 개성으로 비춰질 수 있도록 한 점이 돋보였습니다. 1970년대 쿼츠 위기의 여파가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이러한 혁신적인 설계가 돋보이는 기계식 시계를 발표했다는 것은 1980년대 당시 코럼의 기술력과 맹렬한 도전정신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닐 수 없습니다.
- 골든 브릿지의 아버지, 뱅상 칼라브레제 ⓒ NHC
골든 브릿지의 탄생 배경에는 한 명의 걸출한 시계 장인이 버티고 있습니다. 이탈리아 출신의 천재적인 독립 시계제작자 뱅상 칼라브레제(Vincent Calabrese)가 그 주인공입니다. 독학으로 시계 제작을 배운 그는 1970년대 말부터 스위스 고급 시계 업계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당시 프레드릭 피게(Frédéric Piguet, 편집자주: 스와치 그룹의 전신 SMH의 인수를 통해 블랑팡에 흡수됨)의 오너 자크 피게(Jacques Piguet)와 파트너 장-클로드 비버(Jean-Claude Biver)에 의해 발탁되어 1980년대 초반 브랜드 재건을 목표로 분투하던 블랑팡(Blancpain)을 위한 일련의 플라잉 투르비용 무브먼트(훗날 카루셀까지)를 개발한 인물로도 유명합니다.
- 블랑팡 빌레레 플라잉 투르비용 플래티넘 모델 Ref. 0023-3427-55
뱅상 칼라브레제가 설계한 칼리버 23은 직경 26.2mm, 두께 3.5mm로, 출시 당시부터 지금까지 세계에서 가장 얇은 롱-파워리저브(8일) 투르비용 무브먼트 기록을 유지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칼라브레제는 1985년 독립 시계제작자협회인 AHCI(Académie Horlogère des Créateurs Indépendants)를 공동 설립하는데 앞장섭니다. 그가 전 세계의 재능 있는 독립 시계제작자들로부터 한결 같은 존경을 받고, '독립 시계제작자들의 아버지'로 까지 불리는 데는 그가 남긴 선구적인 업적들에 근거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의 커리어에서 가장 빛나는 성취는 코럼의 골든 브릿지라는 데 대체로 이견이 없습니다. 골든 브릿지는 혁신적인 무브먼트 디자인과 간결하지만 완벽한 설계뿐만 아니라, 기계식 시계제작자들에게 암울한 시절이었던 1980년대 초반 한줄기 빛처럼 세상에 등장했다는 점에서 그 시의성과 상징적인 가치가 더욱 높게 평가 받고 있습니다.
- 오리지널 디자인을 충실하게 잇는 현행 골든 브릿지
투명한 사파이어 크리스탈로 감싼 골드 케이스 중앙에 세로로 긴 수동 무브먼트를 노출하고, 기어트레인을 지탱하는 원-라인 브릿지 위에 시와 분을 표시하는 핸즈를 위치시킨 골든 브릿지 특유의 설계는 지금 관점에서 봐도 상당히 아방가르드합니다. 스켈레톤 시계가 21세기 들어서 그것도 최근에야 본격적으로 유행하기 시작한 것을 떠올리면, 무려 40여 년 전 완성된 골든 브릿지의 디자인이 얼마나 시대를 앞선 것이었는지를 실감케 합니다. 물론 종렬의 기어트레인을 갖춘 시계는 18~19세기 영국에서 유행한 피라미드 형태의 테이블 클락 등에서도 접할 수 있었지만, 이러한 구조적인 특징을 최초로 손목시계 형태로 변주해 상용화에 성공했다는 점이 더욱 특별합니다.
해당 무브먼트를 디자인한 뱅상 칼라브레제는 기어트레인을 구성하는 가장 최소한의 부품만 남기고 일체의 군더더기를 배제함으로써 어쩌면 본인만의 미니멀리즘 철학을 구현한 것이라 볼 수도 있습니다. 배럴 덮개마저 생략해 메인스프링까지 그대로 다이얼 정면에 노출하고, 태엽을 감는 크라운조차 케이스 프로파일이 아닌 케이스백 쪽으로 배치함으로써(훗날 케이스 6시 방향 러그 사이로 이동함) 직선으로 빠지는 케이스 디자인에 걸림이 없게 했으며, 케이스 앞뒤로 두툼한 사파이어 글라스를 통해 무브먼트의 옆모습까지 감상할 수 있도록 한 점 등등… 골든 브릿지는 디테일 하나하나에 기울인 세심함에 혀를 내두르게 합니다.
- 현행 수동 무브먼트 CO 113
오리지널 수동 골든 브릿지 무브먼트의 디자인과 설계를 계승한 현행 CO 113 칼리버는 보쉐(Vaucher) 매뉴팩처와의 기술 협업을 통해 한층 더 뛰어난 내구성과 작동 안정성을 자랑합니다. 오리지널 무브먼트에는 없던 한 세트로 구성한(크로노그래프용 부품에서 착안한) 독자적인 커플링 클러치(Coupling Clutch) 형태의 부품을 추가해 와인딩 및 시간 세팅시 보다 간편하고 정확한 조작을 가능케 하며, 일명 슬리핑 스프링 와인딩 시스템(Slipping spring winding system)을 도입해 오버-와인딩을 원천적으로 방지하는 기술까지 더했습니다. 참고로 CO 113 칼리버는 시간당 28,800회 진동하고(4헤르츠), 약 40시간의 파워리저브를 보장합니다.
무브먼트의 기술적인 개선뿐만 아니라 미적인 개선도 엿볼 수 있습니다. 컬렉션의 상징인 18K 골드 브릿지 상단에 오리지널의 그것보다 더욱 정교하고 아름다운 아르누보풍의 패턴을 브랜드 로고와 함께 수작업으로 새겨 바게트 무브먼트의 유니크한 특징을 강조합니다. 여기에 시와 분을 표시하는 소드 형태의 스켈레톤 핸즈 역시 아름답고 특별한 무브먼트를 최대한 가리지 않기 위한 선택임을 알 수 있습니다. 나아가 현행 제품은 케이스 측면을 아예 오픈 워크 가공해 투명 사파이어 크리스탈을 통해 보다 직접적으로 무브먼트의 측면을, 일렬로 배열한 독창적인 기어트레인을 감상할 수 있습니다. 골든 브릿지를 애정하는 마니아들이 1980년대 제작된 옛 모델뿐만 아니라 현행 모델에도 많은 관심을 갖고 수집을 하는 데는 이렇듯 골든 브릿지 만의 아이코닉한 특징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기술적, 미적 진화를 이뤄냈기 때문일 것입니다.
- 2009년 발표한 Ti-브릿지
- 2012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투르비용 파노라미크
2009년에는 최초로 골드가 아닌 티타늄 소재의 브릿지와 함께 수동 3일 파워리저브 무브먼트를 앞세운 Ti-브릿지(Ti-Bridge)를, 골든 브릿지 탄생 30주년을 맞은 2010년에는 컬렉션 최초로 첨단 실리콘 소재 부품을 대폭 도입하면서 세계에서 가장 작은 직경의 투르비용 케이지를 적용한 골든 브릿지 투르비용(Golden Bridge Tourbillon)을, 2012년에는 이를 좀 더 전통적으로 발전시긴 형태의 골든 브릿지 투르비용 파노라미크(Golden Bridge Tourbillon Panoramique)를 발표하는 등 도전은 계속됐습니다.
- 2012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골드 브레이슬릿
- 2012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오토매틱
또한 2012년 골든 브릿지 컬렉션에 골드 브레이슬릿 라인업을 새롭게 추가하는가 하면, 수동이 아닌 새롭게 자체 개발 제작한 자동 무브먼트(칼리버 C0 313)를 탑재한 골든 브릿지 오토매틱(Golden Bridge Automatic)을 선보여 화제를 모았습니다.
- 골든 브릿지 오토매틱에 탑재한 칼리버 C0 313
기존의 바게트형 수동 칼리버 CO 113을 기반으로, 스틸 소재의 평행 샤프트(바) 사이로 블록 형태의 플래티넘 로터가 움직이며 자동으로 태엽을 감는 구조다. 로터의 마찰력을 줄이고 해당 부품의 수명을 연장하기 위해 세라믹 소재의 볼 베어링을 사용하고, 바의 양쪽 끝 부분에는 실리콘 소재의 조인트를 더해 로터의 무게로 발생하는 충격을 흡수하는 등 세심하고 공학적인 설계가 돋보인다.
- 2013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세라믹
- 2014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드래곤
- 2015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드래곤 & 피닉스
한편 2013년에는 골든 브릿지 특유의 시그니처 디자인은 유지하면서 최초로 블랙 세라믹 케이스를 도입한 골든 브릿지 세라믹(Golden Bridge Ceramic)을, 2014년에는 골든 브릿지 기반에 상상의 동물인 용을 전통 공예-예술적으로 표현한 골든 브릿지 드래곤(Golden Bridge Dragon)을, 2015년에는 전작 골든 브릿지 드래곤의 후속 버전인 골든 브릿지 드래곤 & 피닉스(Golden Bridge Dragon & Phoenix)를 연이어 발표했습니다.
- 2016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라운드 43
- 골든 브릿지 라운드 43 공식 영상
그리고 2016년에는 골든 브릿지를 기존의 직사각형이나 배럴형 케이스가 아닌 최초로 원형의 케이스로 변주한 골든 브릿지 라운드(Golden Bridge Round)를 런칭하는 등 골든 브릿지 컬렉션의 외연을 확장하는 시도를 이어갔습니다. 또한 이듬해 런칭한 골든 브릿지 라우드 39 라인업을 통해서는 가운데 무브먼트를 중심으로 위-아래 여분의 공간에 마치 부채나 쿠튀르 드레스 주름을 연상시키는 장식을 추가하고 컬러플한 스트랩을 조합하는 등 전례 없는 시도를 보여줬습니다. 관련해 유명 워치 디자이너 디노 모돌로(Dino Modolo)가 참여했습니다.
- 2017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라운드 39
- 골든 브릿지 라운드 39 핑크 버전
현재 골든 브릿지 컬렉션은 남성용 젠트(Gent)와 여성용 레이디(Lady) 크게 두 갈래로 나뉘며, 서브 라인업으로 골든 브릿지 오토매틱, 골든 브릿지 라운드 43 & 39, 1980년대 오리지널 직사각형 케이스를 계승하는 골든 브릿지 렉탕글(Golden Bridge Rectangle)과 골든 브릿지 스트림(Golden Bridge Stream)을 운용하고 있습니다.
- 2017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렉탕글
- 2017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스트림 브릿지 오토매틱
- 골든 브릿지 스트림 브릿지 오토매틱 한정판
바게트 무브먼트 양쪽 아치형의 오픈 워크 장식을 전체 레드 래커 처리해 일반 버전보다 더욱 강렬하게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골든 브릿지 스트림은 미국 샌프란시스코의 명소인 골든 게이트 브릿지(금문교)에서 영감을 얻은 아치형의 오픈 워크 장식을 바게트형 무브먼트 양 측면에 배치함으로써 기존의 골든 브릿지 디자인 보다 한층 더 입체적이고 건축학적인 인상으로 어필합니다.
- 2018년 발표한 미스 골든 브릿지
- 2018년 발표한 골든 브릿지 스트림 레인보우
화이트 골드 케이스에 총 96개의 바게트 컷 멀티 컬러 사파이어 세팅
코럼의 골든 브릿지가 탄생한지 오는 2020년이면 어느덧 40주년이 됩니다. 손목시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아이코닉 컬렉션이자 코럼을 세계적인 브랜드로 성장케 한 원동력인 골든 브릿지. 하지만 아직까지도 국내 시계애호가들에게 그 이름은 조금은 낯설거나 멀게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인데요. 그도 그럴 것이 코럼 시계 자체를 국내에서 쉽게 접할 기회가 그간 없었기 때문입니다. 국내 시계애호가들의 오랜 갈증을 헤아리기라도 한 듯 코럼의 한국 공식 수입원 ㈜자스페로코리아를 통해 이제 국내 매장에서도 코럼의 주요 제품들을 만나볼 수 있습니다.
- 중국의 배우이자 코럼의 글로벌 홍보대사인 후빙(胡兵, Hu bing)이 골든 브릿지 제품을 착용한 화보컷
골든 브릿지에 헌정하는 이번 타임포럼 스페셜 컬럼을 통해 해당 컬렉션의 숨은 매력을 발견하는 계기가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며, 제품에 더 관심이 있는 분들은 에비뉴엘 월드타워점 2층에 위치한 코럼 단독 부티크(Tel. 02-3213-2248)를 방문하여 골든 브릿지의 특별한 위용을 직접 느껴보시기 바랍니다.
스토리도스토리지만 무브먼트가 예술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