워치메이커가 보유한 기술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척도로 여겨지는 것 중 하나가 바로 크로노그래프입니다. 크로노그래프는 컴플리케이션 가운데에서 그나마 접근성이 좋은 편입니다. 기계를 조작하는 재미도 쏠쏠합니다. 하지만 이는 부차적인 것에 불과합니다. 복잡하게 얽히고 설킨 각양각색의 부품이 만들어내는 앙상블은 자연의 절경을 보는 듯한 쾌감을 선사합니다. 레버와 톱니바퀴가 유기적으로 움직이며 시간을 재는 이 메커니즘에는 애호가들의 가슴을 요동치게 하는 마력이 있습니다.
과거에는 크로노그래프 제조사가 여럿 있었습니다. 이들은 기계식 시계를 더욱 풍요롭게 가꾼 주역이었습니다. 크로노그래프와 스톱워치로 이름을 날린 미네르바도 그들 중 하나였습니다. 쿼츠 시계의 등장과 업계가 재편되는 과정에서 많은 크로노그래프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습니다. 기계식 시계가 다시 인기를 끌고 인하우스 무브먼트가 화두로 떠오르면서 크로노그래프의 명맥은 이어졌지만 그 수는 그리 많지 않습니다. 핸드와인딩과 캐링 암 방식을 짝지은 크로노그래프라면 손에 꼽을 지경입니다.
몽블랑은 창립 160주년을 맞은 미네르바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취지 아래 타임워커, 스타 레거시, 1858에 서로 다른 세 개의 주제를 덧씌웠습니다. 이들은 각각 레이싱, 파인 워치메이킹, 산악 탐험의 정신을 대변합니다. 이 중에서 1858은 조금 다른 기반 위에 서 있습니다. 몽블랑의 정체성이 뚜렷한 타임워커와 스타 레거시와는 달리 1858은 미네르바를 강하게 부각시킵니다. 몽블랑의 옛 로고, 미네르바의 군용 시계에서 착안한 디자인에서 알 수 있듯이 복고적 감성을 전제로 합니다. 1858이 세상에 나온 지 수 년이 지났지만 제대로 자리를 잡은 건 올해부터입니다. 몽블랑은 엔트리 모델과 고급 모델의 간극을 메우기 위해 오토매틱과 지오스피어 등을 출시했습니다. 젊은 세대를 겨냥한 새로운 콘셉트는 생기를 불어넣었습니다. 그제야 비로소 1858은 완전한 하나의 컬렉션으로 위용을 갖추게 됐습니다.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은 그런 1858의 꼭대기에 있는 시계입니다.
스테인리스스틸 케이스의 지름은 40mm, 두께는 12.15mm입니다. 오토매틱 모델과 더불어 컬렉션 내에서 크기가 가장 작습니다. 러그, 베젤, 케이스백 측면은 폴리시드 처리해 단조로운 새틴 케이스에 활력을 더합니다. 무반사 코팅한 돔 형태의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는 시계를 따뜻하고 예스럽게 만듭니다. 가장자리의 굴곡으로 인해 타키미터 스케일이 명확하게 보이지 않지만 크게 불편한 건 아닙니다. 네 개의 나사로 고정한 사파이어 크리스털 글라스백에는 100m 방수, 몽블랑 랩 테스트 500시간 인증, 고유 번호 등의 정보를 기재했습니다.
홈을 낸 크라운은 조작감이 우수합니다. 크기도 적당해 핸드와인딩 시계가 주는 최고의 선물인 와인딩의 즐거움을 제대로 만끽할 수 있습니다. 움푹하게 속을 파낸 안쪽에는 몽블랑을 상징하는 별이 떠 있습니다. 크라운 옆으로 크로노그래프 스타트, 스톱, 리셋 작동을 도맡은 네모난 푸시 버튼이 솟아 있습니다. 손가락과 접촉하는 면과 측면은 새틴 처리한 반면 둥글게 다듬은 모서리는 폴리시드 처리했습니다.
빛의 반사에 따라 다채로운 색을 표현하는 오리지널 스모크 그린 다이얼은 오묘한 분위기를 연출합니다. 스몰 세컨드와 크로노그래프 30분 카운터가 다이얼을 양분하며, 그 사이에는 몽블랑의 옛 로고가 들어 앉아 있습니다. 슈퍼루미노바를 칠해 봉긋하게 솟아오른 아라비안 숫자 인덱스는 꾸밈이 없고 투박합니다.
다이얼 가장자리에는 측정 대상의 속력을 표시하는 타키미터 스케일을 새겼습니다. 시간당 진동수 18,000vph에 맞춰 1초를 다섯 칸으로 나눴습니다. 덕분에 크로노그래프를 작동시켜 1/5초까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미네르바의 군용 시계에서 자주 등장한 커시드럴 핸즈는 가독성이 뛰어납니다. 전통에 입각해 어두운 공간에서도 시간을 읽을 수 있도록 슈퍼루미노바를 칠했습니다. 크로노그래프 초침과 카운터 다이얼의 바늘은 흰색으로 통일했습니다.
이 시계의 진정한 매력은 내면에 있습니다. 수작업으로 공들여 마감한 칼리버 MB M13.21은 워치메이킹의 세계로 보는 이를 끌어당깁니다. 부품 모서리는 날렵하게 깎고 광을 냈습니다. 5개의 기둥으로 이루어진 컬럼 휠과 곳곳에 박힌 나사는 블랙 폴리싱을 했습니다. 레버는 한 방향으로 결을 살려 새틴 마감했습니다. 빌레레를 의미하는 V자 형태의 크로노그래프 브리지와 톱 플레이트에는 제네바 스트라이프를 새겼습니다. 스테인리스스틸로 제작한 래칫 휠과 크라운 휠의 이빨은 마모를 줄이기 위해 거울처럼 다듬었습니다. 크로노그래프 블로킹 레버에는 미네르바의 트레이드마크가 숨어 있습니다. 황동 휠의 표면은 원형 마감(circular graining)했습니다. 마감 수준은 여느 하이엔드 워치메이커에 결코 뒤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웬만한 고급 시계보다 더 많은 정성을 쏟은 게 느껴집니다. 밸런스 스프링의 유효 길이를 조절하는 레귤레이터 방식을 채택했으며, 나사를 조여 미세하게 오차를 조절할 수 있습니다. 시원시원하게 회전하는 큼지막한 밸런스 휠에는 나사를 박아 전통에 대한 존경을 나타냅니다. 자세 변화에 따른 오차를 최소화하는 오버코일 밸런스 스프링은 빌레레 매뉴팩처에서 자체 제작했습니다.
몽블랑은 대부분의 인하우스 크로노그래프 손목시계에 칼리버 MB M13.21과 16.29를 사용합니다. 전자는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처럼 크기가 작은 모델에, 후자는 더 큰 모델에 들어갑니다. 칼리버 MB M13.21과 16.29는 닮은 점이 많습니다. 우선, 미네르바가 20세기 초반에 개발한 무브먼트(13/20과 17/29)를 기반으로 합니다. 아울러 푸시 버튼이 하나인 모노푸셔 방식입니다. 하지만 둘은 태생부터 다른 무브먼트입니다. 회중시계와 손목시계를 넘나든 칼리버 17/29에 반해 뒤부아 데프라와 합작한 칼리버 13/20은 애초에 손목시계용으로 만든 무브먼트였습니다. 성능과 마감의 관점에서 두 무브먼트의 우열을 가리는 건 힘든 일이지만 순수성을 엄격하게 따진다면 칼리버 MB M13.21쪽으로 무게추가 기우는 게 사실입니다.
메인스프링을 감는 기분은 더할 나위 없이 쾌적합니다. 힘을 많이 주지 않아도 될 정도로 굉장히 부드럽습니다. 크라운을 한 바퀴 한 바퀴 돌릴 때마다 손끝으로 전해지는 미세한 저항감은 절로 미소 짓게 만듭니다. 크라운을 한 번 뽑아 돌리면 시간을 맞출 수 있습니다. 스톱 세컨드 기능이 없어 초침은 멈추지 않습니다. 크로노그래프 푸시 버튼의 조작감은 느슨하지도 빡빡하지도 않습니다. 버튼을 정확히 눌러야 크로노그래프 레버가 움직이기 때문에 오작동은 염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보통 컬럼 휠 방식의 크로노그래프는 조작감이 부드러운 편인데 칼리버 MB M13.21은 이를 상회합니다. 아마 그 비결은 뛰어난 설계와 정밀한 조정일 겁니다.
크로노그래프 조작은 푸시 버튼 하나로 가능합니다. 버튼을 한 번 누르면 크로노그래프가 작동하고, 한 번 더 누르면 멈춥니다. 이 상태에서 버튼을 누르면 크로노그래프 바늘은 원점으로 돌아갑니다. 크로노그래프 분침은 60초에 한 번씩 움직입니다.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의 특성상 계측을 멈춘 뒤 다시 이어가거나 플라이백처럼 재빠르게 새로운 기록을 계측할 수는 없습니다. 조작에 혼동이 생기기도 쉽습니다. 이는 전통에 충실한 대가로 흔쾌히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입니다.
초록색 악어가죽으로 휘감은 스트랩은 이탈리아 플로렌스에 있는 몽블랑의 가죽공방 펠레테리아에서 공수했습니다. 양면에 악어가죽을 덧대고 베이지색 실로 스티칭을 넣었습니다. 구부린 끝은 케이스에 꼭 들어 맞습니다. 핀 버클은 폴딩 버클과 비교하면 조금 불편하지만 시계의 정체성을 감안했을 때 적절해 보입니다.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는 100개 한정 생산되며, 가격은 3700만원대입니다.
시계는 시간을 알려주는 도구죠. 하지만 무브먼트의 아름다움과 나지막이 속삭이는 듯한 진동 소리에 취해 잠시 그 본질을 망각하고 말았습니다. 실로 오랜만에 찾아온 설렘과 흥분. 1858 모노푸셔 크로노그래프 리미티드 에디션이 남긴 깊고도 진한 여운은 좀처럼 가실 줄 몰랐습니다.
이쁘네요 이것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