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Hermès)의 두 번째 슬림 데르메스(Slim d’Hermès)모델 리뷰입니다.
이번에는 타임온리 모델이 아닌 하이 컴플리케이션인 퍼페추얼 캘린더 모델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에르메스가 2015년 바젤월드에서 야심차게 선보인 슬림 데르메스 컬렉션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제게 신선함을 안겨주었는데요.
첫째, 그간 어느 브랜드 시계에서도 볼 수 없었던 독창적인 아라빅 폰트(타이포그래피)를 아워 마커로 도입한 것이고,
둘째, 에르메스 최초로 마이크로 로터를 사용한 매뉴팩처 자동 칼리버를 사용해 울트라 슬림(씬)의 영역에 도전한 것이며,
셋째, 슬림 데르메스를 통해 에르메스 손목시계 제조 역사상 처음으로 완전한 퍼페추얼 캘린더 시계를 선보였다는 점입니다.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Slim d’Hermès Perpetual Calendar)는 또한 지난해 말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에서 '캘린더 워치' 부문을 수상하기도 했지요.
본격적인 제품 소개 이전에 수상 이력부터 언급하는 것이 자칫 시계를 바라보는데 있어 선입견을 줄 소지도 있지만,
그만큼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가 태생적으로 지닌 성취와 개성이 지난 한해 충분한 조명을 받았음을 먼저 얘기하고 싶었습니다.
이 시계에 관한 본격적인 리뷰에 들어가기에 앞서 지난해 소개한 슬림 데르메스 타임온리 스틸 모델 리뷰를 꼭 먼저 보시고 아래 글을 읽어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왜냐면 기능적인 부분을 제외하면 지난 번 소개한 슬림 데르메스 모델과 겹치는 부분이 많고, 저는 이번 리뷰에서 동일한 내용을 다시 반복하고 싶지 않기 때문입니다.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는 직경 39.5mm의 전체 18K 로즈 골드 케이스로 제작되었습니다.
스튜디오에서 촬영한 위 사진상으로는 레드톤이 그리 많이 돌지 않고 옐로우 골드에 가깝게 나온 감이 없지 않아 있는데,
이는 조명의 밝기와 각도상의 문제 때문이지 케이스 소재에 무슨 하자가 있어서 그런 것은 아님을 미리 밝혀 둡니다.
현대의 남성용 드레스 워치 사이즈로는 37~40mm 정도가 아마 가장 이상적인 사이즈로 언급되곤 합니다. 저 역시 그렇게 생각하는데요.
파네라이나 IWC처럼 전통적으로 오버사이즈를 지향해온 예외적인 경우도 물론 있지만, 그 외의 일반적인 예를 들면 그렇습니다.
에르메스의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는 40mm에 조금 못 미치는 39.5mm로 가히 최적의 사이즈라 하겠습니다.
이는 함께 출시된 남성용(GM) 타임온리 자동 모델과도 동일한 크기인데요.
두께가 얇은 케이스와 짧고 끝이 뿔처럼 휜 독특한 러그 형태와도 조화로운 밸런스를 보여줍니다.
케이스는 전체 폴리시드 가공되었으며, 베젤부가 그리 두껍지 않기 때문에 다이얼이 케이스 직경에 비해 좀 더 커보이는 효과를 선사합니다.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케이스 형태는 그럼에도 단조롭지 않고, 구석구석 슬림 데르메스만의 개성을 담고 있으며,
무엇보다 첫눈에 시선을 사로잡는 부분은 시계의 얼굴인 다이얼입니다.
전체 실버 오펄린 처리된 다이얼 바탕에 블랙 컬러로 아라빅 인덱스와 각 서브 다이얼 숫자, 그리고 브랜드 로고를 프린트했습니다.
에르메스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필립 델로탈(Philippe Delhotal)이 최초 디자인하고,
그래픽 디자이너 필립 아펠로아(Philippe Apeloig)가 완성한 독창적인 타이포그래피(Typography), 폰트를 사용해 한눈에 에르메스 시계임을 알아볼 수 있게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대체로 하나의 시계를 볼 때 인덱스(아워 마커)나 다이얼을 구성하는 여러 세심한 디테일은 자칫 간과하는 면이 있습니다.
브랜드서 기존 컬렉션을 바탕으로 다이얼 디자인을 리뉴얼해 새롭게 선보여도 이전 모델과의 차이를 알아보는 이는 기실 많지 않은데요.
이러한 소소한 차이들이 그럼에도 해당 시계의 특징과 격을 드러내는 것임은 시계를 좋아하는 이라면 공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입니다.
아라빅 아워 마커 가운데 부분을 분절시킨 '슬림 데르메스'표 타이포그래피는 자세히 보면 또 흥미롭게도 숫자 1과 11에는 분절 처리를 하지 않았는데요.
숫자 1이 지닌 상징성 때문이기도 하겠지만(first, No. 1), 숫자 1까지 전부 가운데를 끊어서 표시하면 10, 11, 12와 캘린더(날짜)에 사용된 그 이상의 숫자들을 판독하는데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일 것입니다. 역시나 세심한 디자인 파워가 돋보이는 부분으로, 이들이 슬림 데르메스를 런칭하면서 얼마나 많은 노력을 기울였는지 알 수 있습니다.
이렇듯 다이얼에 사용된 모든 아라빅(숫자) 인덱스에는 슬림 데르메스만의 타이포그래피를 적용했습니다.
반면 영문 프린트는 끝이 둥글둥글한 모던한 폰트 형태를 사용했습니다. 숫자 인덱스와 겉돌지 않고 잘 어울립니다.
캘린더 기능의 배열도 흥미로운데요.
다이얼 12시 방향의 서브 다이얼로는 포인터 핸드로 날짜를, 9시 방향에는 월과 함께 윤년 주기를,
6시 방향에는 12시간 인디케이션으로 세컨 타임존, 즉 GMT를 표시합니다.
그리고 그 바로 위 원형의 홀을 통해 홈타임의 낮/밤 시간대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3시 방향 서브 다이얼은 문페이즈를 표시하는데요.
자세히 보시면 문페이즈 디스크 바탕은 블루 컬러의 어벤츄린(Aventurine, 사금석 砂金石)을 사용했으며,
그 위에 달의 형상은 화이트 마더오브펄(Mother-of-Pearl, 진주자개)을 원형으로 커팅해 부착했습니다.
문페이즈 디스크에 블루 어벤츄린을 사용한 예는 예거 르쿨트르나 샤넬의 시계에서도 볼 수 있지만,
에르메스의 문페이즈 디스크는 과하지 않은 절제미를 보여줍니다. 이 또한 브랜드의 특징을 엿볼 수 있는 요소라 하겠습니다.
일반적인 래커 처리 문페이즈 디스크와 달리 어벤츄린 소재의 특성상 자잘한 운모 알갱이가 마치 밤하늘의 별을 연상시키며,
마더오브펄 문(Moon) 표면의 불규칙한 패턴 역시 흡사 달의 분화구를 떠올리게 합니다. 결과적으로 작은 소재의 변화로도 큰 효과를 얻은 셈입니다.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의 다이얼을 다시 한 번 보시겠습니다.
캘린더와 함께 여행이나 출장이 잦은 현대인들에게 특히나 유용한 GMT 기능을 추가한 다이얼은 사면에 위치한 4개의 서브 다이얼로 조화롭게 배치돼 있습니다.
캘린더를 표시하는 상단 3개의 서브 다이얼에 비해 하단 6시 방향의 세컨 타임존 표시 다이얼의 크기가 좀 더 크다는 것도 주목할만 합니다.
세컨 타임존은 4시 방향의 푸셔형 코렉터로 별도 세팅이 가능한데요. 1시간 단위로 점핑하며 함께 낮/밤 인디케이터도 활성화됩니다.
시계가 작동하는 상태에서도 간편하게 세컨 타임존을 조정할 수 있다는 점과 최근 보편적으로 사용되는 시간 단위로 점핑하도록 한 점 역시 설계의 영리함을 보여줍니다.
원형의 낮/밤 인디케이터는 낮에는 화이트 컬러로, 그리고 오후 늦게(7시에서 10시 사이 시간대)에는 블루 컬러와 함께 레드 컬러가 슬그머니 등장했다가
밤 11시에서 자정 무렵에만 완전히 레드 컬러로 채워집니다. 3가지 컬러를 사용해 순차적으로 낮/밤을 표시하는 점 또한 설계자의 센스가 돋보이는 부분인데요.
퍼페추얼 캘린더 시계를 리뷰하는데는 애초 시간상의 제약에 부딪치게 마련인데,
그럼에도 에르메스의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는 우아한 문페이즈 디스크와
개성적이고 영리한 낮/밤 인디케이터와 푸셔(코렉터) 덕분에 시계에 금방 호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케이스 측면 2시 방향에 위치한 코렉터로는 문페이즈(달의 위상)을 세팅할 수 있습니다.
그 반대편 케이스 좌측 프로파일 상단 10시 방향의 코렉터로는 월을, 8시 방향의 코렉터로는 날짜를 조정할 수 있습니다.
그외 크라운을 뺀 1단 상태에서 로컬 타임(시와 분)을 세팅할 수 있으며(핵기능 지원), 이와 맞물려 듀얼 타임 표시 핸드도 함께 움직입니다.
무브먼트는 슬림 데르메스 기본 자동 모델에 탑재된 그것과 같은 베이스를 공유하는 마이크로 로터 설계의 매뉴팩처 자동 H1950 칼리버입니다.
4개의 스크류로 고정된 사파이어 크리스탈 케이스백으로 보이는 브릿지 형태만 봤을 때는 기존 타임온리 버전의 H1950과 차이가 전혀 없어 보입니다만,
다이얼 사이드(바텀 플레이트) 쪽으로 별도의 퍼페추얼 캘린더 모듈이 추가되었습니다.
이 공식 이미지가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용 H1950 칼리버의 앞면인데요.
하이 컴플리케이션의 위엄을 보여주는 퍼페추얼 캘린더 무브먼트답게 상당히 복잡한 설계를 보여주고 있지요?!
위 첨부 사진 기준 플레이트 부분을 자세히 보시면 위 코너에 골드 페인트로 AGH 111RS 513-918 로 각인된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바로 이 각인에 이 무브먼트 설계의 숨은 실마리가 담겨 있는데요.
AGH는 무브먼트 스페셜리스트인 아장호(Agenhor)의 이니셜을 뜻합니다.
아장호는 독립 시계제작자이자 컴플리케이션 장인으로 통하는 장-마르크 비더레히트(Jean-Marc Wiederrecht)가 창립하고 무브먼트 수석 개발자로 있는 회사입니다.
이 H1950 QP(퀀템 퍼페추얼의 약자, 퍼페추얼 캘린더를 의미함) 버전 개발에 장-마르크 비더레히트와 아장호의 워치메이커들이 메인으로 참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H1950 칼리버 자체는 보쉐(Vaucher) 매뉴팩처가 개발 제작한 베이스를 사용하고 있다는 것은 지난 리뷰에서도 말씀드린 바 있는데요.
보쉐를 소유하고 있는 산도즈 재단의 메인 브랜드 파르미지아니 플러리에를 통해서는 PF701 칼리버로 사용되고 불리며,
보쉐가 공급한 에보슈(VMF5300)는 과거 해리 윈스턴과 리차드 밀에까지 사용될 만큼 이미 그 설계의 특별함과 내구성을 공인받아 왔습니다.
수년전 이미 독창적인 레트로그레이드 모듈을 올려 완성한 '아쏘 타임 써스펜디드'로 에르메스와 최상의 궁합을 보여준
장-마르크 비더레히트와 다시금 손잡고 이번에는 보쉐의 든든한 자동 베이스(H1950)에 아장호의 퍼페추얼 캘린더 모듈을 얹어
브랜드 최초의 마이크로 로터 타입 자동 퍼페추얼 캘린더 손목시계인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를 완성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2011년 아쏘 타임 써스펜디드으로 제네바 시계 그랑프리(GPHG)서 '남성 시계' 부문을 수상하고,
2015년 GPHG에서는 '캘린더 시계' 부문을 수상한 것을 감안하면, 에르메스와 비더레히트(아장호)의 파트너십은 항상 큰 화제를 불러왔다고 하겠습니다.
에르메스는 토털 패션브랜드들이 흔히 빠지기 쉬운 '컬렉션의 구색을 맞추기 위한 형식적인 시계 컬렉션'을 구성하는 식의 딜레마에서 탈피해,
진지한 정공법으로 파인 워치메이킹을 지향하고 있습니다. 아직 보쉐와의 파트너십으로 인해 완전한 인하우스 체제를 구축했다고 보기는 어렵지만,
에르메스는 능력있는 파트너들과의 협업을 통해 다채로운 컬렉션으로 그간 존재감을 증명해 왔고 고급 시계 제조 기반은 이미 충분히 갖춰진 상태입니다.
퍼페추얼 캘린더 버전의 H1950 칼리버는 직경 30mm에 두께 4mm에 불과합니다.
기존 타임온리 버전이 2.6mm 두께였음을 감안할 때, 아장호의 캘린더 컴플리케이션 모듈의 두께는 고작 1.4mm임을 알 수 있습니다.
소재 특성상 두께가 있는 어벤츄린 문페이즈 디스크와 퍼페추얼 캘린더, 그리고 GMT와 낮밤 인디케이터까지 갖추고 있는 무브먼트로는 실로 얇은 두께이며,
이는 기능 배열이 조금 다르지만, 얇기로 소문난 오데마 피게의 2120 자동 베이스에 퍼페추얼 캘린더 모듈을 얹은 5134 칼리버보다 0.31mm가 더 얇은 수치입니다.
물론 오데마 피게의 그것은 풀로터라는 점이 근본적인 차이가 있습니다만... 바쉐론 콘스탄틴의 1120 베이스의 퍼페추얼 캘린더보다도 칼리버 두께는 0.05mm가 얇습니다.
H1950 칼리버는 시간당 3헤르츠 진동하며, 42시간의 파워리저브를 갖고 있습니다.
크라운을 당겼을 때 스톱 세컨즈(핵기능)를 지원하며, 4개의 편심 웨이트가 추가된 프리스프렁 밸런스를 사용했습니다.
별도로 크로노미터(ex. COSC) 인증이나 보쉐가 속한 플러리에 지방의 퀄리테 플러리에 같은 것은 받지 않았지만
자체적인 5자세차 조정과 엄격한 테스트를 통과한 무브먼트와 시계만 출고했다는 게 브랜드가 강조하는 부분입니다.
기존 에르메스의 매뉴팩처 칼리버들과 마찬가지로 브릿지 전체에 에르메스를 상징하는 H 모노그램 패턴을 레이저로 인그레이빙해 특유의 그래피티적인 인상을 더합니다.
무브먼트의 성능은 자치하고라도 타임온리 버전에 비해 퍼페추얼 캘린더 버전에는 보다 하이엔드 피니싱이 가미되었으면 좋지 않았나 하는 개인적인 아쉬움은 남습니다.
스트랩은 에르메스 자체 공방에서 제작한 매트한 브라운 컬러(에르메스는 하바나라고 칭함)의 엘리게이터 가죽을 사용했습니다.
에르메스의 가죽 품질이야 긴 말이 사실 필요가 없지요. 단, 위 리뷰 모델의 경우 판매용이 아닌 까르네(프로토타입)인지라 상태를 감안해서 봐주시길 바랍니다.
참고로 판매용 모델은 지난해 말(12월)에 국내에 소량 입고되었습니다.
서울 신사동에 위치한 에르메스 도산 파크 메종에서 만나볼 수 있지요.
핀 버클도 케이스와 동일한 로즈 골드로 제작되었으며, 특유의 H 이니셜 형태를 살려 통일감을 부여합니다.
전체 폴리시드 가공한 버클의 마감 상태나 스트랩 체결시의 결탁력 또한 우수합니다.
퍼페추얼 캘린더 기능에도 마이크로 로터 자동 무브먼트 두께 4mm, 케이스 두께 9.06mm로
그저 사진으로 보는 것보다 손목에 올렸을 때 확실히 그 '얇음'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케이스 직경 역시 40mm 미만에 양쪽 러그 길이 또한 짧은 편이기 때문에 손목 위에서 즉각적인 안정감과 편안한 착용감을 보장합니다.
에르메스의 슬림 데르메스 퍼페추얼 캘린더는 일부 전통있는 하이엔드 시계 제조사들의 전유물처럼 분류돼 온
울트라 씬 자동 퍼페추얼 캘린더의 영역에 토탈 패션 브랜드인 에르메스가 당당히 도전해 결실을 얻었다는 점에서 태생적인 특별함을 갖고 있습니다.
또한 여느 브랜드 시계에서는 볼 수 없는 개성적인 디자인(아라빅 폰트)과 오직 에르메스를 위해 개발된 익스클루시브 무브먼트를 사용했다는 점에서도
시계에 비범한 가치를 부여하는데요. 더불어 특유의 절제미 속에 파인 워치메이킹의 유산을 거부감 없이 자연스럽게 녹여낸 점 역시 호평을 받을 만한 부분입니다.
100년이 넘는 시계 제조 역사에도 불구하고 그간 몇 가지 이유로 제대로된 평가를 받지 못했던 에르메스의 시계를 이제 보다 진지하게 바라볼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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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봣습니다^^